
해가 거듭될수록 여름이란 계절이 싫어진다. 멈출 줄 모르고 작렬하는 광염의 끈적함도 싫고, 더위에 지쳐 감정조절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불편하다. 사소한 일에도 금세 뜨거워지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라도 묘수를 내어 그들을 삭여줘야지 생각은 하는데, 삭이기는커녕 나도 함께 곧잘 끓어 넘친다. 그렇게 마음의 평정심이 중심추를 잃어 어쩔 도리가 없을 때가 올여름엔 자주 찾아왔다. 그러면 나는 나약한 핑곗거리로 모난 계절을 탓하곤 했다. ‘요놈의 얄미운 더위를 내 어찌할꼬’ 하면서.
안목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 자산
배우고 익혀야 자라는 지혜의 힘
편견 버리고 수행으로 다져가야

그런 어느 날, 지인들과 함께 북촌의 한옥 호텔이라는 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불교 사찰이 오래된 한옥이고, 현재도 한옥 형태의 절집에 사는지라 지인들이 함께 가보자고 권했을 때만 해도, 그곳이 그렇게 특별한 공간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도심 뒷골목을 포행하듯 느린 걸음으로 아담한 고가(古家)에 들어선 순간, 어느새 나는 승려가 아니라 점잖고 올곧은 선비가 된 기분이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한 방과 누각, 곳곳에 걸린 행초서 글씨에서는 묵향이 밴 듯했다. 시선을 고택 어느 한 곳에 고정해 놓고 차를 마셔도 좋고, 붓을 들어도 좋을 만한 풍경들이 가득했다. 아무리 보아도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은 아닌, 그야말로 장인의 안목과 철학이 빚어낸 한옥이었다. 엄숙함이 깃든 절의 느낌과는 또 다른 아늑함과 평온함에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더구나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전혀 바깥세상을 안에 들이지 않으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에 들어섰을 때는 ‘아, 이런 안목 나도 갖고 싶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한옥 호텔을 지은 고수의 안목에는 한옥에 대한 사랑은 물론, 옛사람의 마음까지도 담긴 듯했다. 안내해 주는 이는 부족함이 많다며 겸손하기까지 해서 덕(德)까지 갖춘 사업가로 보였다. 아무튼 이곳저곳 쓱 한번 둘러보고 나왔는데도 여운이 꽤 길었다. 전통문화를 가까이하고 있는 불교도로서 한옥 건축물에 대한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과 같은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팔공산 은해사라는 절이 큰불로 다시 짓는 불사를 하게 되었는데, 당대 최고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편액을 올리게 되었다. 대웅전은 물론, 조실스님 채부터 종각까지 추사 선생의 글씨가 곳곳에 걸렸다. 그런데, 불사를 맡은 당시 주지 스님이 추사 선생이 써준 ‘불광(佛光)’이라는 글씨의 한 획(佛)이 너무 길어서 고민이었다고 한다. 틀에 맞게 편액을 올리려는 마음이 컸던 그는 결국 현판 규격에 맞춰 긴 획을 잘라서 내걸었다. 추사 선생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은해사에 들른 추사 선생은 잘린 획에 불쾌한 나머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떼어내 대웅전 앞에서 불태워버렸다는 일화이다.
‘보는 눈’이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자질이다. 최고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안목(眼目)은 있어야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글씨나 그림 등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세상과 사람, 문화도 그렇다. 보는 눈은 곧 지혜의 눈, 안목이다. 그런데 그 안목을 키우기가 쉽지 않다. 항상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일본의 어느 선생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고미술을 공부하는 경우 ‘이것은 진짜고, 저것은 가짜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한다. 시대별 지역별 진품만 계속해서 보여주다가 어느 날, 위작(모방품)을 보여주면 학생들이 금세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다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학생들은 진짜와 가짜를 제대로 구별해낸다는 설명이었다.
고미술에 대한 안목처럼, 삶에는 배워서 길러질 수 있는 눈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제대로 된 것들을 눈에 많이 익혀서 특징과 핵심을 잡아내는 방법이다. 어쩌면 사람을 보는 안목도 비슷하지 않을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훌륭한 사람을 보면서 배우고, 선한 사람을 벗하여 착한 행실을 배우며, 좋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으니까.
불교에서는 ‘진면목(眞面目, 인간 본래의 참모습)을 보라’거나 ‘드러내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선정 수행을 권하고, 내면에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여서 크고 올바른 통섭의 시각을 갖추도록 일깨운다. 편견을 버리고 인간과 세상을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일이든 선택하는 것도 나요, 영향받는 것도 나다.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들 각자는 그 어떠한 영향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백로가 지나니 조석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 끝자락이 보인다.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