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총선으로 본 한국의 정치문화 지형

2025-02-25

독일에서 사회민주당(SPD), 녹색당, 자유민주당(FDP)으로 구성된 이른바 ‘신호등 연정’이 작년 11월에 무너지고 지난 23일 시행된 연방의회 총선에서 예상대로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이 기독민주연합(CDU)·기독사회연합(CSU)의 연합에 이어 제2당이 되어 사민당의 자리를 밀어냈다. 극우의 거센 바람이 유럽 정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는 현실을 거듭 확인해 주었다. 반이민적인 정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의회 정치에 관한 서적도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이 중에는 한국 의회 풍경을 다룬 것도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구 동독지역에서 태어난 젊은 언론인 베냐민 프리드리히가 쓴 <의회에서 난투>라는 책의 표지에는 의회가 난장판이 되었던 여러 나라를 세계지도 위에 표기하면서 한국 옆에는 ‘인분 투척’이 쓰여 있었다.

이를 보면서 나는 1966년 9월 삼성 재벌이 일본으로부터 건설자재를 도입한다는 명목으로 사카린을 대량으로 밀수했다가 적발되어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사건을 곧 떠올렸다. 이 문제와 관련, 모 일간지에 실렸던 나의 짧은 기고문도 생각났는데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달 압력 때문에 삼성이 저지른 비리 사건이었다.

당시 국회 대정부 질의 시간에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 의원이 국무총리 정일권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장기영에게 “X이나 먹어, 이 XX들아”하면서 인분을 뿌렸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의원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그러나 공분으로 들끓었던 사회 여론은 그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오히려 옹호했다.

얼마 전 조지아 공화국 의회에서 친러시아와 친서방 의원들 사이에 말 대신에 주먹이 오가는 일도 있었다. 의사당이 난투장으로 변한 경우가 그리 드문 일이 아닌데도 저자가 거의 60년 전에 한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서술하는 것을 보니 의사당 안에서 인분을 투척했던 사건은 세계 의정사에 특별히 기록될 사건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의회 민주주의 역사가 비교적 오랜 서유럽에서 주먹 대신에 말로 싸우는 모습 역시 여러 가지다. 가령 영국 의회에서 보여주는 논쟁 모습은 격렬하고 때로는 연극적인 요소까지 가미된 검투사 간의 싸움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유머 섞인 분위기는 살아 있다. 이탈리아 의회 논쟁은 이탈리아인의 열정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개인적인 인신공격과 도전적인 수사까지도 총동원되어 시끄럽고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한다. 프랑스 의회 논쟁 분위기도 이탈리아처럼 때로는 격렬하지만, 이보다는 훨씬 절제되어 있다.

한국서 좌·우는 진보·보수로 등치

이에 비하면 독일과 북유럽 의회 논쟁은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발언이 적고 비교적 사실관계에 치중하는 논쟁이 많지만, 생동감은 떨어진다. 하지만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 극우 정당이 힘을 얻어가면서부터는 의회의 논쟁 분위기도 상당히 거칠어졌다.

이처럼 주로 의회에서 진행되는 논쟁 분위기를 보고 어떤 나라의 정치문화가 세련되었다거나, 아니면 그렇지 못하다거나를 따지는 것은 사실 너무 단편적이다. 한 나라의 정치문화는 모든 제도를 포함한 정치 체제에 대한 그 나라 국민의 정치적 지향의 분포양상과 함께 그들의 정치적 의견, 태도, 심정은 물론 노동과 여가, 종교나 교육에 대한 견해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교적 일찍부터 이를 위한 이론 틀을 모색했던 미국의 정치학자 가브리엘 알몬드와 시드니 바버는 1960년대 미국·영국·서독·이탈리아 그리고 멕시코를 대상으로 한 경험적인 비교연구를 통해 민주적 참여형, 권위주의에 쉽게 동의하는 복종형,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전통적인 부족(部族)형이라는 세 가지 이념형을 제시했다. 물론 이런 이념형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 섞여 있기 마련이지만 두 사람은 바람직스러운 균형을 이룬 정치문화를 영국과 미국에서 보았다.

정치문화의 이러한 유형론적인 접근 방식과 달리 역시 미국의 비교정치학자인 로널드 잉글하트는 생존 문제가 절대적 가치로 인정되는 전근대, 이런 물질주의적인 욕구가 점차 충족되는 산업화 단계를 거치면서 탈물질주의적인 가치까지 추구하는 단계로 가치의 진화를 주장했다. 이 탈물질주의적 단계에서는 자아실현, 복지와 안전이 추구되어야 할 가치로서 받아들여지면서 물질주의적인 차원을 넘어 인권이나 환경과 같은 새로운 가치까지 추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주도로 1981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7차, 한국을 포함한 120개국에서 시행된, ‘세계가치관조사’(WVS)에 관한 방대한 설문조사에 따른 경험적 연구는 자아실현의 가치가 높을수록 민주주의적인 정치문화가 확립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민주주의, 쿠데타로 수술대에

이 연구기관이 ‘한국 사회과학데이터센터’에 의뢰한 2010년의 조사를 위한 설문지에는 응답자에게 자신이 진보와 보수, 어디에 속하는지를 묻는 항목도 들어 있었다. 설문지의 영어는 원래 좌파인가 우파인지를 묻고 있는데 우리말로는 진보와 보수로 번역되어 있다. 좌파는 진보로, 우파는 보수로 등치되고 있는 한국적 정치문화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사는 한국은 이미 전통적인 사회에서 탈물질주의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로 진입했고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신뢰도는 높지만,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크며 이에 따른 강한 저항문화가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1996년 4월 한국 방문을 앞둔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는 서울에서 자신이 발표할 강연 원고를 나에게 보내면서 내용이 어떤지를 물어왔다.

나는 원고에 나오는 좌파라는 단어가 한국적인 맥락에서는 쉽게 오해될 수 있기에 진보라는 용어가 무난할 것 같고, 공화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도가 아직 낮아서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돌려야 할 것 같다는 답을 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 공화주의 혁명의 유산이었던 좌우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서 쉽게 통용되기 어려운 사정에는 역시 분단의 갈등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사용되었던 좌파라는 용어도 한때는 ‘혁신 세력’으로 대체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종북 좌파’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더니 얼마 전부터는 이들을 척결하겠다는 ‘반공 우파’나 ‘자유 우파’도 등장했다.

대체로 좌우라는 용어가 명시적인 정치적 이념의 내용을 보여주는 데 대하여 진보와 보수는 이의 문화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어서 좌우라는 개념보다는 정치적 부담감도 작으므로 한국의 정치문화의 중요한 범주로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 이념으로 좌나 우, 진보와 보수는 양자택일의 간단명료한 상대적 개념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중도라는 제3의 영역도 있고, 심지어는 좌우 개념이 서로 결합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상호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민족주의와 볼셰비즘을 결합한 ‘우익의 좌익’이 보여준 정치적 스펙트럼이 그런 예의 하나였고, 소련의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도 ‘러시아 민족볼셰비키당’이 등장했다가 금지된 예도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정치적 용어 가운데 진보, 보수 그리고 중도가 있는데 온 사회가 탄핵이라는 열병을 앓고 난 후에 시행될 대선을 앞두고 모두 중도확장만이 승리의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과열된 이념전쟁에서 중도가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회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주도하는 좌파, 보수당이 이끄는 우파는 정치문화의 지속적인 상수였다. 그러나 지구화의 충격 속에서 사회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중도는 극우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독일의 이번 총선 결과도 이를 여실히 증명했다. 이번 총선에서 비록 극우가 중도 공략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지만, 전통적인 보수세력은 극우세력과의 연정은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탄핵 반대를 외치면서 사법부에도 폭력과 위해를 가하는 세력을 옹호하는 보수가 있다면 이는 이미 보수가 아니라 극우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정치문화 지형이 유럽의 그것과 설사 다르더라도 이 점에서는 다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윤석열의 실패한 친위쿠데타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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