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숫자에 매몰된 노인일자리 사업

2025-09-18

자동차 회사에서 20년을 근속한 70대 남성 A 씨는 은퇴 뒤 지자체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지하철역에서 교통 안내와 환경 미화 업무를 맡고 있다. 하루 3~4시간, 주 1~2회 근무로 한 달에 30만 원 남짓을 번다. 그는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건 감사하지만 평생 쌓아온 경력을 살릴 기회가 전혀 없다”며 아쉬움을 털어놨다. 은퇴 전 전문성과 무관한 단순 노동에 머무는 현실은 노인 일자리 정책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정부 대책은 고령층 일자리의 질보다는 숫자 늘리기에 무게를 두고 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고령자는 평균 73.4세까지 일하고 싶다고 답했고 실제로 우리나라 65세 이상 고용률은 37.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연금소득이 부족한 탓에 더 오래, 더 많이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가 2030년까지 노인 일자리를 110만 개에서 130만 개로 확대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숫자보다 질이 문제”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공익형(청소·안내) 비중을 줄이고 돌봄·상담 같은 서비스형과 민간 취업 연계형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업무는 여전히 음식 조리·보조 등 단순한 업무가 대부분이다. 자동차 부품 관리나 안전 점검처럼 직전 커리어를 살릴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전체 일자리의 60% 이상이 공익형에 집중되면서 학력과 경력을 갖춘 베이비부머 은퇴자들의 기대와는 괴리가 커지고 있다.

지자체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행사에 치중하는 모습도 문제다. 서울 마포구의 한 시니어카페에서 만난 60대 여성 바리스타는 “시니어 바리스타 대회가 열린다는데, 구청장이 온다 하니 사실상 참여가 강제됐다. 노인들 데리고 장기자랑을 시키는 것 같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현장 어르신들은 보여주기식 행사보다 커피 머신 교체나 마감 교육처럼 근무에 직접 도움이 되는 지원이 더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고충을 털어놓을 창구조차 없는 현실도 지적된다.

노인 일자리는 빈곤을 완화하는 안전망이자 고령사회의 동력을 키울 토대다. 그러나 고령층의 경험과 전문성을 활용할 자리가 늘지 않는다면 ‘130만 개 일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은퇴 세대의 역량을 사회적 자산으로 전환하는 촘촘한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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