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 수혜 속 구조조정 지연…선도기업 치중 전략 재검토 필요

2025-03-13

위기의 철강산업, 탈출구는 없나

철강산업이 위기다. 지난해 생산량이 5.7% 감소하는 등 지난 10여 년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대부분의 철강사가 수익성이 악화하거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포스코는 2개 공장을 폐쇄했고, 현대제철도 포항2공장을 폐쇄하려다가 노조 반발로 축소 운영 중이다. 포항지역의 경제와 고용은 큰 타격을 받아,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12일부터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25% 보편관세를 부과했다. 트럼프는 2018년에도 철강 관세를 부과한 적이 있다. 당시는 협상 끝에 쿼터를 적용받아 수출 물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타결을 보았는데,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전개 상황에 따라 안 그래도 어려운 철강산업에 엎친 데 덮친 상황이 될 수 있다. 철강산업이 겪는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2015년 중국발 위기에도 구조조정 없이 안주했던 한국 다시 흔들

일본은 위기마다 대규모 M&A·잉여설비 폐쇄 등 구조조정 전력

중국산 후판에 반덤핑 관세…연관산업 경쟁력 훼손도 고려해야

이제라도 사업재편·기술개발 투자 등 적극적 산업정책 추진 필요

‘산업의 척추’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

인류 문명의 역사는 철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 철강 제품은 자동차·조선·전자·기계·건설 등 거의 모든 제조업의 중간재로 사용돼 ‘산업의 쌀 또는 척추(backbone)’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제조업 강국이 되려는 나라들은 철강산업을 적극 육성했다. 영국·미국·일본·중국의 순서로 이어진 세계 제조업 주도국가의 역사는 철강산업 주도국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자국 제조업의 부흥을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가 철강산업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은 세계 6위의 철강 생산국이자, 세계 3위의 수출국이다. 1973년의 포항제철소 준공을 한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 전환점으로 보는 이가 많다. 같은 관점에서 오늘의 철강산업이 겪는 위기는 한국의 제조업, 나아가 한국경제 전반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상징하고 있을 수도 있다.

철강산업의 구조적 위기는 사실 오래됐다. 중국은 2000년대부터 철강 생산을 빠르게 늘려 오늘날에는 세계 철강 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대 이후에는 중국 수출품의 저가 공세를 견디지 못한 국내 철강사들의 어려움이 커졌다. 특히 2015년에는 중국의 내수 침체로 과잉생산 물량이 해외로 대거 쏟아져 나왔고, 국제가격이 폭락했다. 그 결과 포스코가 창사 이래 첫 적자를 기록하고, 당시 업계 3, 4위였던 동국제강과 동부제철이 존폐 위기에 몰리는 등 철강업계 전반이 크게 흔들렸다.

한국은 국내 수요보다 많은 양의 철강을 생산해 수출해 온 나라다. 중국이 더 낮은 비용으로 생산해 한국에까지 대량 수출하는 상황에서 이런 초과생산 구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는 민간이 알아서 생산량을 줄이기 기대했고, 기업들은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당시 철강산업의 숨통을 틔워 준 것 역시 중국이었다. 중국 정부는 스스로 2억t 규모의 노후 설비 폐쇄를 추진하며 잉여 공급량 조절에 나섰다. 수급 여건이 개선되고, 미국 내 철강 가격 상승과 각국의 경기부양을 위한 대규모 재정집행이 이어지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구조조정 없이 현상 유지에 안주하면 위기는 다시 오게 마련이다. 2021년부터 중국의 부동산 경기가 악화해 내수 수요가 크게 줄었고, 잉여 물량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국내적으로도 경제성장 여력이 줄어들고 극도의 내수 부진이 이어지면서 수요가 줄어든 것이 전례 없는 위기의 원인이다.

이번에도 알아서 해결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국 정부는 재차 구조조정과 생산 축소를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국내 철강 수요의 감소 추세는 우리 경제의 성숙도를 고려할 때 앞으로도 반전되기 어렵다. 미국, EU 등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들도 자국 철강산업의 보호 및 육성에 매진하고 있어 수출 시장 확대도 녹록지 않다. 당장 세계 제2위의 철강 생산국인 인도는 2030년까지 생산량을 2배로 늘리려 하고 있다.

탄소중립 규제를 넘어야 하는 난제

철강산업은 탄소 다배출 산업이다. 철강산업의 상징적 모습인 펄펄 끓는 용광로의 쇳물은 코크스라 불리는 고탄소 정제 석탄을 엄청나게 태워야 만들 수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석탄 대신 수소를 이용하는 수소환원제철 방식을 쓰거나, 고철을 전기로 녹여 철강을 재생시키는 방식을 이용해야 한다. 수소환원제철 방식은 아직 미완의 기술이어서 현재는 전기로 방식의 활용도가 늘고 있다. 고철이 풍부하고 전기료가 싼 미국의 경쟁력이 다시 살아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탄소 배출량을 40% 줄이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해 놓은 상태다. 지금 대로라면 철강산업을 포함한 제조업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고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여기에 EU는 2026년 1월부터 고탄소 방식으로 생산되는 철강 수입 시에 탄소 국경조정세(CBAM)를 부과한다고 선언했다. 고매한 이상을 덧붙였을 뿐 우리에게는 관세와 마찬가지다.

모든 위기에는 기회가 숨어 있다. 중국 철강의 힘이 크긴 하지만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국가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도 운신의 폭을 넓힐 여지가 있다. 트럼프 관세 역시 우리 제품의 경쟁력만 있다면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관세로 인해 물량 규제가 풀린다면 시장 확대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탄소중립 규제 역시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므로, 기술개발에 앞서나간다면 기회를 잡을 여지가 있다.

그러려면 이제라도 적극적인 사업재편과 기술개발 투자에 나서야 한다. 경쟁력을 회복하기 어려운 제품들의 생산은 과감히 줄이고, 고기술·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웃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는 대규모 인수·합병(M&A)과 잉여설비 폐쇄 등을 통해 일본제철·JFE와 같은 초대형 업체가 탄생했다. 그 결과 수익성 회복은 물론 세계 철강산업 변화에 주도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에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허용 여부가 미·일 관계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종합경쟁력 세계 1위를 목표로 추진 중인 일본제철의 글로벌 전략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대내외 여건이 우리와 비슷했음에도 이처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이유를 주목해야 한다.

시장 지키다 구조조정 늦추진 말아야

이번에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2015년의 경험도 있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방향성 정립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첫째는 선도기업의 변화 필요성이다. 우리 철강산업의 중심은 포스코와 현대제철이다. 이 두 기업만이 철광석을 녹이는 고로부터 최종 철강제품 생산 설비까지 갖춘 일관제철소를 보유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높은 경쟁력과 탄탄한 수요처를 확보한 이들 기업이 가장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격 경쟁력이 뒤처지며 중간 원재료를 수입해 생산하는 기업보다도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들조차도 구조조정의 안전지대가 아니며, 보호 위주의 정책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간기업이지만 사실상 국가대표기업(National Champion)으로 육성과 지원을 받은 선도기업에 대한 전략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둘째는 트럼프로 상징되는 보호무역주의 확대다. 과거에도 철강산업은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주의가 심한 편이었다. 반면, 우리 철강산업은 관세 부과나 반덤핑 조치 등 수입 규제가 비교적 약했다. 국내 시장 잠식을 방치한다는 비판도 컸지만,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로서 상대국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달 20일 한국은 중국산 후판 제품에 최고 38%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는데, 이는 흐름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당장 다른 제품에도 비슷한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국제적 보호무역 전쟁이 치열해지면 우리만 문을 활짝 열어 놓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호의 대가에 대한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무역 갈등 심화는 물론이고, 철강산업에 꼭 필요한 구조조정을 늦추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연관산업의 경쟁력이 훼손되는 것도 문제다. 당장 후판을 많이 사용하는 조선업·건설업 등은 반덤핑 관세로 인한 원자재 비용 상승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보호정책을 쓰더라도 산업의 중장기적 발전 방향과 연관산업에 미치는 효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철강은 제조업 강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는 한국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산업이다. 거칠어진 국가 간 경쟁의 틈에서 생존하려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비교적 분명하다. 다만 험난한 길로 나아갈 의지를 현실화할 수 있는지가 한국 철강산업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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