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설을 앞두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설 명절 구매 희망 선물세트’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선호도가 높은 것은 과일혼합세트와 사과세트였다. 지난해 추석에도 사과세트가 꼽혔다. 그러고 보면 사과는 주고받는 데 큰 부담 없는, 보편적이고 무난한 명절 선물로 여겨진다.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라거나 ‘하루 사과 한 알이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건강식품으로 꼽히는 데다 다른 과일에 비해 보관성이 좋다는 점도 사과의 미덕이다.
그런데 사과는 이 미덕만큼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다.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인지 모르겠다. 최근 들어 별 모양 사과 같은 신품종이 나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과를 보고 호기심과 설렘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품종까지 따져가며 구매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복숭아나 딸기와 달리, 사과 품종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주력 품종인 부사를 제외하면 감홍, 아오리, 양광 정도가 이름이 알려진 사과 품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애플망고나 샤인머스캣 같은 과일이 섞여 있는 과일박스 앞에선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오롯이 ‘사과’로만 들어찬 박스 앞에선 좀 무덤덤해지게 마련이다. 오랫동안 일상에서 보고 먹었던 그 친숙함이 죄라면 죄랄까.
앞으로 이런 친숙함이 그리워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지난해 초 사과 한 알이 1만원에 판매될 정도로 사과값이 고공행진을 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요인으로 기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사과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지리 조건을 갖고 있어 오랫동안 사과 재배가 활발했다. 덕분에 흔전만전 사과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환경적 요인으로 사과 재배가 어려워진다면 어떻게 될까. 경북과 충청권이 사과 주산지로 자리 잡고 있지만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이제는 강원도에서도 사과가 나오니 말이다.
사과는 국내뿐 아니라 유럽, 북미 등 전 세계에서도 흔하고 친숙하게 여기는 과일이다. 인류와 함께한 역사도 오래다. 신화에도 등장한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됐던 사건 ‘파리스의 심판’에 나오는 과일이 사과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아름다움을 겨루는 자리에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주겠다”며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건넨다. 신화 속 영웅 헤라클레스에게 여신 헤라가 벌로 내린 과업 중 하나는 사나운 용이 지키고 있는 정원에서 사과를 따오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온 사과는 서양 문화권에선 과일의 기본으로 인식되어 왔다. 구체적 명칭을 듣기 전까지 ‘과일’이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사과를 추측한다는 것이다.
켈트 기독교와 대립한 로마 기독교
북유럽 상징 과일 부정적으로 왜곡
선악과·백설공주처럼 ‘유혹’ 표상
신대륙 개척시대부터 이미지 변신
척박함 이겨낸 미국 솔 푸드로 사랑
성경에 등장하는 금단의 열매 ‘선악과’에 대해서도 사과일 것이라는 추측이 오랫동안 지배했다. 17세기 영국 시인 밀턴은 <실낙원>에서 선악과를 사과라고 지칭했다. 남성들의 목 앞부분에 튀어나온 결후를 일컫는 말도 ‘아담의 사과’(Adam’s Apple)다.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인 사과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재배 기록이 있다. 로마 시대에는 인기가 높아지면서 재배가 성행했는데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사과는 엄청난 사치품이기도 했다. 로마 귀족들은 미식에 탐닉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대 로마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페트로니우스가 네로 시대의 향락 문화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 <사티리콘>에는 숨 막힐 정도로 음식이 쏟아져 나오는 연회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 시절에 알프스에서 실어 온 얼음에 재운 포도주를 음미하는 것으로 시작된 연회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귀한 요리를 더 많이 먹기 위해 깃털로 목구멍을 간질여 먹은 것을 토해내고 다시 먹었다는 로마인들의 기벽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아무튼 이처럼 식탐에 진심이던 로마인이 연회의 마지막에 마무리로 먹은 것이 사과다.
신화 속의 아프로디테가 들고 있던 사과, 뱀의 꼬임에 빠진 여자가 사과로 여겨진 선악과를 남자에게 건네는 모습. 이는 수많은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했고, 이 때문에 사과는 유혹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사과를 베어 물다라는 프랑스어 표현 ‘크로케 라 폼’(Croquer la Pomme)은 ‘유혹에 넘어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어 단어 malice(악의), malicious(악의적인)의 어원은 라틴어 ‘malus’에서 찾을 수 있다. ‘나쁘다’는 뜻의 malus에는 사과나무라는 뜻도 있다. 사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강화에는 유혹적인 새빨간 색깔, 새콤달콤한 이중적인 맛도 영향을 미쳤다. 또 사과를 세로로 잘랐을 때 보이는 심 부분은 여성의 몸을 암시하는 것으로, 가로로 잘랐을 때 나타나는 별 모양은 악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동화 <백설공주>에서 마녀가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 사과를 이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사과에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뒤 오랜 시간 기독교가 서양 문화권을 지배해 온 것과 무관치 않다. 음식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스튜어트 리 앨런은 저서 <악마의 정원에서>에 그 이유를 ‘로마 가톨릭의 패권 유지를 위해서’라고 썼다. 남부 유럽이 로마 가톨릭 문화의 중심이었다면 북부 유럽은 켈트족 등 이교도의 지역이었다. 켈트족은 로마 가톨릭과 달리 자신들의 고유 신앙인 드루이드교에 기독교를 받아들여 켈트 기독교를 만들어냈다. 로마 가톨릭과 켈트 기독교의 대립은 불가피했고 5세기 후반에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다. 켈트 기독교를 이교라 선언한 로마 가톨릭은 이때부터 북유럽의 상징적 과일이던 ‘사과’에 왜곡된 이미지를 씌우기 시작했다. 북유럽 신화에서 사과나무는 생명을 주는 불멸의 나무로 여겨졌다. 켈트족 신화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이상향 ‘아발론’은 사과나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사과는 지혜와 생명을 의미하는 신성한 과일이었다. 혹자들은 이를 포도 문화권과 사과 문화권의 대립으로 보기도 한다. 남부 유럽에서는 포도가 많이 나 포도주를 종교적 의식에 주로 사용했고, 사과가 많이 나는 북부 유럽에서는 사과주를 성스러운 의식에 썼다.
사과를 폄훼하려는 로마 가톨릭의 ‘의도’ 때문에 같은 아서왕 전설이라도 쓰인 시기에 따라 사과의 의미는 크게 다르다. 이탈리아 음식문화칼럼니스트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는 <맛의 천재>라는 책에 “5세기에 쓰인 원전에서 마법사 멀린의 지혜는 ‘달콤한 사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신부 제프리가 쓴 12세기 버전에서 멀린은 ‘여성들만의 사악한 쾌락으로 가득한’ 사과를 맛본 뒤 ‘미쳐서 침을 흘리는’ 인물로 등장한다”고 썼다.
사과의 본격적인 이미지 변신은 근대 이후 미국에서다. 유럽에서 신대륙 개척에 나선 사람들이 가져간 사과는 19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시골 곳곳에 사과 과수원이 자리 잡았고 사과로 만든 애플파이, 사과로 만든 브랜디 ‘애플잭’ 등은 척박한 개척 환경을 이겨내는 솔(soul) 푸드이자 동반자였다.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사이먼 반즈는 <100가지 식물로 읽는 세계사>에서 “사과는 미국에서 사랑받는 상징이 되었고 미국 최고의 도시 뉴욕을 부르는 별명(빅 애플)이 되었다”면서 “미국은 스스로를 개척정신과 사과파이를 바탕으로 건설한 나라라고 여기길 좋아한다”고 밝혔다. 19세기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사과는 우리 미국의 과일”이라며 “우리 삶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사회적 교류를 돕는 이 과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보다 외롭고 고립되며 지지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이는 영국의 전통 음식이지만 애플파이는 미국을 상징하는 음식이 됐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쓴 해리엇 비처 스토는 애플파이를 두고 “파이는 미국 땅에 뿌리내린 즉시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 매우 다양한 속과 종으로 폭발적으로 번식했다”고 했다. 이 같은 흐름은 지극히 미국적이라는 뜻을 가진 숙어 ‘as American as apple pie’라는 표현이 나온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