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은 해방, 고교생은 지옥 갇혔다…강남 8학군의 서막

2025-10-22

대한민국 '트리거 60' ㊸ 고교평준화

박정희 정부의 수많은 정책 중 진보 인사들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부터 겪어야 했던 ‘입시지옥’에서 어린 학생들을 해방한 교육정책이다. 1960~70년대 초까지 ‘입시지옥에서 어린이를 구출하자’ ‘공부 노예로부터 해방해 국민학교 어린이에게 웃음을 주자’는 등의 구호와 함께 캠페인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이승만 정부 때 의무교육 실시로 50년대 후반 취학 연령 어린이는 거의 모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생들을 가르칠 중학교는 턱없이 부족한데 진학하려는 학생이 급증하다 보니 자연스레 입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교육열은 지금 못지않게 대단했고, 사교육 열풍이 사회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64년 12월, 서울시 전기(前期) 중학교 입학시험 땐 이른바 ‘무즙 파동’이 벌어졌다. 자연(지금의 과학) 18번 문항이 문제였다. ‘밥으로 엿을 만들려고 한다. 만약 엿기름이 없다면 대신에 무엇을 넣으면 될까?’ 디아스타제·무즙·꿀·녹말 중에서 골라야 했다. 발표된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다. 하지만 일부에서 “무즙도 정답”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당시 서울시 김원규 교육감은 “만약 무즙으로 엿이 된다면 이 문제 때문에 떨어진 수험생은 구제하겠다”며 무마하려고 했다.

명문으로 분류되던 경기중·서울중·경기여중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실제로 무즙을 사용해 솥에 엿을 만들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까지 제기했다. 법원은 전문기관의 판단에 따라 ‘무즙도 정답’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박정희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문교부 차관, 서울시교육감 등 고위직 5명을 잘랐다.

67년엔 과외 공부에 시달리던 국민학생 4명이 1주일 넘게 집단 가출한 사건이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이젠 과외 안 시킨다.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의 기사가 실렸다. 당시 박정희는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더 시키고, 어린 학생들은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심신을 고루 발달시킬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경기고-서울대’ 출신 장관이 총대 메

이후에도 입시 과열 분위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제도를 바꾸는 것이 빨랐다. 박정희 정부는 칼을 빼들었다. 69년 서울을 시작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없애고 추첨제로 바꿨다. 중학교 입시와 관련된 각종 파동의 진원지였던 경기·서울·경복·이화 등 소위 14개 명문 중학교를 폐지하는 강수도 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71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은 전국으로 퍼지며 빠르게 정착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교 입시가 문제였다. 중학교 입시의 경쟁 풍토가 그대로 옮겨갔다. 고교 진학도 무시험 또는 내신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는 74년 ‘고교평준화 정책’을 꺼내들었다. 시험을 보고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던 방식에서 근거리 배정, 무작위 추첨, 지원 후 추첨 등을 통해 고교에 가게 됐다.

총대는 아이러니하게도 학벌의 정점인 ‘KS(경기고-서울대)’ 출신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멨다. 그는 “80~90년대의 한국 사회는 소수 엘리트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대중사회가 될 것이다. 사회발전을 둔화시키는 전통적인 상징을 허물어뜨려야 한다”며 고교평준화 도입 이유와 방향성을 언급했다. 그는 훗날 “속칭 KS 마크가 출세의 척도가 된다는 사회의 그릇된 통념은 국민총화에 역행하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했다”고 술회했다.

서울·부산에서 시작된 고교평준화는 75년 대구·인천·광주, 79년 대전·전주·마산·청주·수원·춘천·제주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사실 정책적 명분과는 별개로 박정희와 측근들은 학벌 위주로 형성된 사회 주류 집단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박정희는 권력을 잡은 직후부터 학벌, 문벌, 각종 파당 등을 자주 비판했다. 종친회·문중회·향우회는 물론 각종 학회와 클럽마저도 파당을 형성하고 국민을 분열시킨다고 생각했다. 평상시 그의 이런 생각은 고교평준화 정책이 나오는 데 영향을 미쳤다. 혁명가다운 진단이었지만 박정희도 ‘박사 위에 육사’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무튼 고교평준화는 늘 박정희가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자 집권 시기 가장 급진적인 개혁 정책으로 평가된다. 특히 서슬 퍼런 유신시대였기 때문에 정부 정책은 일사천리로 시행될 수 있었다. 과도한 중학교 입시 경쟁으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워낙 심한 탓에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도 뒷받침됐다.

정부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하나로 서울의 기존 명문고를 사대문 밖으로 옮기는 일도 동시에 시작했다. 소위 5대 공립고 중에서 경기고와 서울고, 5대 사립고 중에선 휘문·배재·양정·보성 등 4개교를 이전하도록 했다.

“뺑뺑이 세대 후배 아냐” 동문회도 따로

여학교 중에도 경기·창덕·숙명·진명 등의 명문고가 자리를 옮겼다. 이전이 결정된 일부 학교에선 반발도 있었다. 경기고는 원래 학교 부지가 좁아 반대가 덜했다. 그러나 널찍한 경희궁 터에 자리 잡고 있던 서울고는 사정이 달랐다. 명문고 지위를 잃은 것도 기분 나쁜데 좋은 터를 버리고 이사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해당 학교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다. 명문고 졸업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추첨으로 입학한 소위 ‘뺑뺑이 세대’를 후배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일부 학교에선 동문회를 따로 하기도 했다.

뺑뺑이로 학생이 배정되면서 경성·대일·서라벌·신일·여의도·우신 등이 신흥 명문고로 부상했다. 고교평준화 정책 시행과 함께 강남으로 옮겨간 전통 명문고와 신흥 명문이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강남 8학군’의 신화도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고교 입시 경쟁은 자연스럽게 대입 경쟁으로 옮아갔다. 중학교 무시험은 국민학생을, 고교평준화는 중학생을 입시지옥에서 해방했다. 하지만 고교평준화 이전보다 몇 배 치열한 대입 경쟁이 시작됐다.

50년 전 시작한 고교평준화 정책은 한국사회에 무엇을 남겼을까. 학교 간 서열을 없애고 학생들 사이의 위화감·차별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입시 부담 완화로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학교 시설의 전반적인 개선에도 기여했다.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는 효과도 거뒀다. 우려하던 학력의 하향평준화도 예상보다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꽤 성공적인 정책이었음에 틀림없다. 반면에 수준별·적성별 교육 과정을 편성하는 데 방해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인재 발굴과 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불리하다는 주장 역시 꾸준히 제기됐다.

고교평준화를 놓고 존폐 논쟁은 여전하다. 더 좋은 교육 정책을 위한 활발한 토론, 문제 제기는 반길 일이다. 하지만 국민소득 1000달러도 되지 않던 시절에 시작한 고교평준화 정책을 지금의 보수·진보라는 어느 한쪽의 이념 잣대로 재단하고 판별하는 것은 난센스다. 전국 모든 지역, 특히 인구가 감소하는 중·소도시 지역까지 고교평준화를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지방에도 서울대 10개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지방에 좋은 시설의 건물을 세운다고 해서 우수한 자질의 학생을 해당 지역의 학생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을까.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과거 많았던 지방 중소 도시의 전통적 명문 고교가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명문 고교를 다시 육성해야 한다. 지금대로라면 ‘새로운 서울대’가 지방에 생기더라도 수도권 학생들이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역에도 우수한 학생이 많이 남아 있어야 서울대 10개 만들기 공약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일부 비수도권 지역의 고교평준화 해제 문제를 검토할 필요도 있다. 인구 감소와 양극화 시대에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고민이 50년 고교평준화 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오히려 더 잘 계승하는 일이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초등 의무교육’ 편입니다.

박대권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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