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49〉과기처 장관 안면도 사태 관련 경질…후임 장관에 비과학자 출신 김진현씨 임명

2025-01-21

1990년 11월 9일. 노태우 대통령이 이날 오후 5시 30분쯤 청와대 집무실에서 강영훈 국무총리와 급히 만났다. 예정에 없던 면담이었다. 두 사람은 30여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노 대통령은 면담이 끝나자 이수정 청와대 대변인을 호출했다.

오후 6시. 청와대 기자실로 내려온 이수정 대변인은 과학기술처 장관 경질과 후임 장관을 발표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충남 안면도 주민 시위 사태와 관련해 국무총리의 제청을 받아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을 경질하고 신임 과학기술처 장관에 동아일보 논설주간인 김진현 씨를 임명하셨습니다.” 비과학자 출신 과학기술처 장관의 등장이었다.

이수정 대변인은 “노태우 대통령은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든지 책임을 물어 관련자를 인책한다는 인사 원칙에 따라 이번 안면도 사태의 책임을 물어 과기처 장관을 경질한 것”이라면서 “노 대통령은 과학자 출신을 과기처 장관에 임명하던 관례와 달리 언론인 출신을 임명한 것은 과학 분야 인사가 아니어도 과학기술 분야 혁신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균형적인 지식과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인사 배경을 설명했다.

과학기술처 장관의 경질을 불러온 안면도 시위 사태란 무엇인가. 경위를 알아보자.

1990년 11월 2일 정부는 국내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을 충남 태안군 안면도 일대에 건설키로 잠정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게 시위 도화선이었다.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방침에 안면도 주민들은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11월 6일 오전 11시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결사 반대 투쟁위원회'는 안면읍 시외버스터미날 광장에서 주민과 학생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면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저지대회'를 열었다. 이후 초·중·고등학생 90% 이상이 등교를 거부했고, 경찰관 승용차를 빼앗아 불태웠다. 과격 시위자들이 공무원을 납치 폭행하고 읍사무소를 점거하는 등 반대 시위는 갈수록 과격해졌다.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은 8일 “주민들이 반대하면 어떤 시설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근모 전 장관의 회고록 증언. “1990년 10월 말.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를 마치고 귀국해서 한창 건설 중인 대덕연구단지를 방문했는데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이 급히 나를 찾아왔다. 소장은 안면도에 건설할 핵폐기물처리장에 대해 보고했다. 장관직 인수 때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원자력연구소가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처 이상희 전 장관과도 충분한 논의 없이 충남도와 협의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면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이 들어온다는 기사가 나가자 주민들이 반발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기적을 만든 나라의 과학자)

정근모 장관은 이날 강영훈 총리를 만나 사의를 표명했다.

“원자력 주무장관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습니다.”

강영훈 총리는 만류했다.

“정 장관 취임 전 일 아닙니까. 정 장관이 책임질 일은 아닙니다.”

이튿날인 9일 오후 강영훈 총리는 청와대로 올라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정근모 장관 사의 표명을 보고했고, 노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장관 취임 7개월 20일 만의 단명 퇴진이었다. 그는 다시 아주대 석좌교수로 돌아갔다. 동료 교수와 대학원 학생들이 그를 대환영했다. 그는 훗날 김영삼 정부에서 두 번째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발탁됐다.

비과학자 출신인 신임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에서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논설주간으로 일했다. '김진현 칼럼'을 장기 집필, 명칼럼으로 명성을 날렸다. 대통령 직속 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1965년 5월 18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린든 존슨 대통령과 발표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을 특종 보도했다. 두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 14개항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내용은 12번 항목이었다.

“양국 대통령은 학교 교사로서 과거 경력을 상호 상기하고 양국의 모든 수준에서 교육의 필요성과 기회에 관해 협의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 기술과 응용과학연구소를 한국에 설치하는 가능성과 관련 한국 공업 과학 및 교육계 지도자와 검토하기 위해 존슨 대통령의 과학 고문을 한국에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제의를 환영했다. 연구소, 시험소 등은 한국 산업 발전을 위해 기술 지원과 연구조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과학자에게 그들이 연구조사를 계속할 기회를 줄 것이라는 게 존슨 대통령의 생각이다.”

국내 어떤 언론도 이런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무국장인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도 이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김진현 전 장관의 회고. “1965년 5월 20일자 3면 전면 해설 '두 정상의 흥정, 경제적 산물'을 경제부 차장인 내가 썼다. KIST 탄생을 공식으로 문자화한 것인데 한국 언론에서 이 기사는 단 한 줄도 없고 내가 쓴 해설 한 문장이 유일한 알림이었다”(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회고록 증언. “연구소 설립이라는 항목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 동아일보 김진현 경제부 차장이 그 중요성을 대서특필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김진현 장관이 입각 제안을 받은 건 11월 9일 오후.

논설주간으로 사설 마감 후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데 김종인 청와대 경제수석이 전화를 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꼭 좀 맡아 줘야겠습니다.”“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합니까.”

“사정이 급합니다. 대통령이 꼭 좀 맡아 달라고 합니다.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주간 아니면 안 됩니다.”

“내일 논설위원 전원과 호남 여행을 가기로 했으니 그들과 상의해 보고 월요일에 답을 주겠습니다.”

짐시 후 오후 3시쯤. 동아일보 정치부장이 전화를 했다.

“김 선배, 축하합니다. 과학기술처 장관 되셨네요.”

“누가 그런 소릴 해?”

“지금 청와대 기자실에서 발표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김 장관의 회고. “일생 이렇게 난감하고 황당한 적이 없었다. 꼭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그때 김병관 당시 사장도 전화로 “너 나한테 말도 않고 이러기야”라고 했다. 아마 나한테 뒤통수를 맞은 것으로 생각한 듯 했다. 나도, 김 사장도, 과학기술계도 모두 의외인 일방적인 인사발령이었다.”(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이튿날인 11월 10일 오전 10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접견실에서 김진현 신임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그 자리에는 강영훈 국무총리가 배석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김진현 신임 장관에게 당부했다.

“그동안 언론계에서 과학기술 향상을 위해 쌓은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능력을 발휘해서 과학기술처가 과학기술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 주기 바랍니다.”

장관 임명장 내용은 간단했다. “임명장. 김진현. 국무위원에 임함. 과학기술처 장관에 보함. 1990년 11월 10일. 대통령 노태우.”

김 장관은 청와대를 나와 과학기술처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열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말했다.

“나는 과학기술처 창립 이래 최초의 비과학자 출신 장관입니다. 개인적으로 '비과학자 출신임에도 과학자 출신 장관보다 못하지 않고 더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비과학자 언론인 출신 김 장관의 공직 생활은 이렇게 닻을 올렸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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