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연휴의 끝입니다. 금요일 연차를 쓰면 사흘을 더 연장할 수 있다지요. 매일 출퇴근하는 직업이 아닌지라 휴일이나 연휴의 의미가 크지는 않습니다만, 새해 달력을 받으면 습관적으로 빨간 날을 훑어보게 됩니다. 보통 오뉴월과 구시월이 연휴의 가능성이 높은 달인데, 하필 그때가 바로 나들이 가기 딱 좋은 계절이란 말이죠. 그러니 기회를 볼 수밖에요. 추캉스라는 말이 나오고 말고요.
기후변화로 교란된 계절 감각
매미 소리로 가을 가늠 어려워
11일은 대이동하는 철새의 날
인공조명 뚫고 잘 날아와 주길

어찌 보내셨을까요. 저마다 다른 시간을 보냈겠지만, 계절의 느낌만큼은 한결같았을 듯합니다. 아 가을이 오기는 오는구나. 여름이 끝나긴 끝나는구나. 폭염의 기세가 9월 넘어 10월까지 가겠구나 걱정이 많았는데. 매미 소리가 끝나고 귀뚜라미 소리가 대신하더니, 바람의 색깔과 나뭇잎의 물기와 공기의 질감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가을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그래서 더 소중한, 어쩐지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계절입니다.
추석날 차례상을 차리다가, 햅쌀로 지었더니 밥이 너무 질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하던 어머니가, 불현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습니다. 백일홍 꽃이 세 번 피고 져야 햅쌀밥을 먹는 건데, 꽃이 벌써 다 진 거야? 어머니에게 추석은 햅쌀밥, 햅쌀밥은 백일홍, 백일홍 피면 여름 지면 가을. 추석이라고 햅쌀은 사다 놓았지만, 정작 꽃 진 것은 확인하지 못했으니, 아직은 여름이다 하고 싶던 걸까요. 내 어머니의 계절 감각은 꽃으로 시작해 꽃으로 끝을 맺습니다.
오래전 내 할머니는 매미 울음소리로 날씨를 알아차렸지요. 매미 소리가 지랄 맞아야 비로소 장마가 끝나는 거라고. 그전에는 함부로 고추를 내다 널어서는 안 된다고. 치이이이 말매미 울음소리가 아니라 맴맴맴 참매미 울음소리가 커지면 그때가 바로 고추 널기 좋은 날씨인 거라고. 할머니는 어찌 알았을까요. 따로 공부한 것도 아니면서. 장마에 알이 썩거나 휩쓸려 가는 일이 없도록 기상관측에 감각을 키운 매미의 생존 전략을. 기온에 따라 시간차를 두고 짝을 찾는 말매미와 참매미의 생애주기를.
이제 고추 널기 좋은 날을 매미 울음소리로 가늠하다가는 낭패를 봅니다. 마른장마, 폭염과 폭우의 반복. 사라진 여름 태풍과 가을 태풍의 공포. 매미도 헷갈릴 테지요. 도대체 언제 울음을 시작하고 끝내야 하는지. 매미 첫울음 관측 시기가 평년보다 무려 18~27일 빨라졌다 하지요. 여름이 길어진 만큼 매미의 울음소리도 길어지고, 치이이 다음에 맴맴맴 순서도 지켜지지 않고. 대형트럭이 지나갈 때와 맞먹는 매미 울음소리가 한밤중에서 새벽까지 이어지는 건 말매미 탓이 아닙니다. 열대야와 열섬효과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요. 시골 쥐 도시 쥐처럼 매미 울음소리도 이제 시골 참매미와 도시 말매미로 나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집 앞 감나무를 통해 계절을 듣습니다. 한동안 뜸했던 새들이 익은 감을 먹기 위해 분주히 날아들거든요. 제일 먼저 까마귀가 오고 까치 다음에 참새 직박구리 순입니다. 가끔 다른 종의 울음소리도 들리지만 누가 왔는지 확인해 볼 생각은 없습니다. 까마귀 소리가 나면 아침이로구나 이불을 끌어당기고, 직박구리가 여럿 몰려와 시끄럽게 떠들고 나면 이제는 일어나야지 침대를 나섭니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고도 새소리만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달이 넘어갈 때는 그달의 기념일을 살펴보곤 합니다. 기념일로 지정한다는 것은 인식의 필요성이 크다는 것이겠지요. 그만큼 취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국군의 날을 비롯해 경찰 노인 임산부 호스피스의 날이 있고, 독도의 날도 시월이네요. 절기로는 한로와 상강. 찬 이슬이 맺히는 시기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를 이릅니다. 상강에 과연 서리가 내릴까요? 입추와 처서는 그렇다 치고 백로와 추분에도 꽤 더웠으니, 아무래도 절기는 옛말이 된 듯합니다.
지난 4일은 세계 동물의 날, 다가오는 11일은 세계 철새의 날입니다. 동물의 날은 멸종위기 동물과 야생동식물, 비인간 생명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기념일입니다. 철새의 날은 다른 기념일들과 달리 일 년에 두 번, 5월과 10월 둘째 주 토요일로 지정합니다. 여름 철새와 겨울 철새가 대이동을 하는 때에 맞추어서. 올해 세계 철새의 날 슬로건은 ‘조류 친화적 도시와 커뮤니티 만들기’라지요.
철새들의 이동은 이미 시작되었겠지요. 겨울을 나기 위해, 체력 보충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겠지요. 그 길은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요. 낮처럼 밝은 도시의 인공조명이 새들의 방향감각을 방해하겠지요. 슬로건으로 내건 조류 친화적 도시라는 말이 조류 취약 도시라는 말로 읽힙니다. 새들이 도착할 즈음이면 가을 끝 겨울 시작입니다. 새들의 계절이 무사하길. 더없이 아름다운 이 계절도 안녕하길. 마음을 다해 빌어봅니다.
천운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