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과연 이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이 전쟁의 가장 큰 책임은 유럽의 현상타파를 추구한 러시아에 있지만,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러시아의 의도를 읽지 못한 서방의 실패도 있다.
종전협상에서 러시아의 편에선 트럼프가 2월 말 정상회담에서 젤렌스키에게 모욕을 가했을 때, 나에게 떠오른 것은 바로 포르투갈의 노벨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가 쓴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였다. 한 도시에 갑자기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도시 전체로 퍼지고 눈먼 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진다. 수용소 내 식량을 불량배들이 선점하고 식량을 나누어주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귀중품과 여자를 요구한다. 귀중품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살기 위해 심지어 여자들까지 그들에게 바친다. 인간의 이기심 속에서 존엄성은 무너지는 것이다.
러-우 전쟁의 책임 서방에도 있어
푸틴 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트럼프, 휴전 추진하면서 또 오판
러시아, 종전협상서 양보 안할 것

이 모든 일이 그저 눈이 멀어서 벌어진 일이라면, 다시 시력을 회복하면 이런 비극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시력이 문제없었던 시기에도 사람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시력을 회복한 후 나온 주인공의 말이 우리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이 ‘볼 수는 있으나 보지는 않는 눈먼’ 서방 지도자들이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된 또 하나의 축이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만 보유했어도 이 전쟁이 일어났을까. 소련 해체 당시 세계 3위의 핵무기보유국이던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경제지원과 안전보장을 얻는 대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는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했다. 당시 국제정치학 석학 존 미어샤이머 교수 등 전문가들은 러-우 간의 역사적 관계로 볼 때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우려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우크라이나에 핵 포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미 정부는 이 주장을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초 크림반도를 점령함으로써 부다페스트 각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클린턴 대통령조차 자신이 우크라이나를 압박하여 부다페스트 각서를 통해 핵을 포기하게 만든 것을 후회했다.
서방이 순진하게 러시아를 믿은 또 다른 사례는 세계 최대 해저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이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마리옹 반 렌테르겜이 쓴 책 『노르트스트림의 덫』을 보면 원래 서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기존 가스관은 우크라이나를 관통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는 이것을 인질로 러시아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를 우회하여 발트해에서 서유럽에 들어가는 러시아 가스관을 두 개나 만드는 것을 지지했다. 노르트스트림 1과 2다. 슈뢰더와 메르켈 같은 독일 지도자들은 독일이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것은 러시아가 독일에 의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노르트스트림 건설을 옹호했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막아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일견 완벽해 보였던 이 이론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박살 났다. 노르트스트림은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푸틴의 트로이 목마였다.
문제는 러시아에 대한 오판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신속한 종전을 공약한 트럼프는 러시아와 화해정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에 크게 편향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어떤 대통령도 유럽동맹국을 불신하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러시아의 편을 든 적이 없다. 전쟁당사자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은 종전협상의 전략 측면에서도 부적절하다. 그러면 러시아가 양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푸틴을 무한 신뢰하면서 그가 평화를 원한다고 믿었지만, 그게 오판이었다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개인이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오판하면 개인적 손해를 입는 데 그치지만 국가가 다른 국가의 의지를 오판하면 전쟁을 겪게 된다. 러-우 전쟁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서방이 만들어낸 큰 전략적 실패였다. 3월 31일자 뉴욕타임즈가 지적했듯이 트럼프 시대의 국제질서는 올림픽보다 이종격투기에 가깝다. 이종격투기의 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 모두가 두 눈을 다시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권기창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한국수입협회 상근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