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진이 울산 그리고 동면에서 어업이 가장 활발했다고 하지만 해조류와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해안가에서 이루어지는 어업에 그쳤다. 따라서 통어를 위해 먼바다까지 나갈 수 있었던 일본 어선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방어진에 일본인이 집단이주해 정착한 후에는 바로 옆 일산진과 마찰이 빚게 된다.
당시 어민들 사이의 충돌은 1910년 7월 26일과 28일에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의 제목은 “기막혀 죽겠네” “어부 충돌”인데 ‘7월 21일 밤에 충돌해 2~3명이 다쳤다’는 것과 ‘울산군 연해변에서 한인 어부와 일인 어부가 일전에 서로 충돌했는데 소관경찰서에서 한인 어부만 수십여 명을 착수하였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내용으로 볼 때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대규모로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이 된다. 또 한일강제병합(8월 22일)이 조인되고 발효 전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경찰의 태도가 일본인에게 편파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로도 어민들의 갈등과 충돌은 계속됐다. 1912년 2월 11일 <경남일보> 기사에는 방어진에서 일본인 어선이 조업 과정에 충돌해 파손당하는 사건으로 경남도청 직원이 급파됐다는 내용이 실렸다. 5월에는 동면뿐 아니라 해안 지역에서 일본인 어부들의 강탈이 계속되자 용잠동에 모인 어부들이 각지에 통문을 돌려 조선인 1000여 명이 장생포에 모여 집단항의하는 사태로 번졌다. 1912년 8월 25일 <매일신보> 기사에는 울산 어민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식산국장을 출장 보내 일단락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신문은 유화책으로 어민조합과 어민 권리 보호 등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1차 사립 보성학교 개교와 폐교
1905년 이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위기에 몰리자 공교육을 메우고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근대교육을 위한 사립학교가 전국 각지에 문을 연다. 이는 무너지는 국운을 바로 세우려는 각 지역 인사들이 나서고 유지들이 합심한 결과였다. 울산의 사립학교는 갑오개혁 이후 공백 상태가 된 지방관청 건물을 이용해 개교했다. 울산도호부 관사에 세운 사립 개진학교(1905), 언양읍성 관사에 세워진 사립 영명학교(1906), 경상좌병영이 해산한 후 빈 건물에 문을 연 사립 일신학교(1906)가 대표적이다.
울산 동면에서는 1907년 울산목장 감목관사에 사립 개운학교가 개교했다. 개운학교는 동부동, 서부동, 전하동, 미포동, 염포동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1909년 1월에는 일산진에 사립 보성학교가 개교해 일산동, 화정동, 방어동 학생들을 수용했다.
이때 개교한 보성학교를 1920년 같은 이름으로 개교한 보성학교와 비교해 1차 보성학교로 부를 수 있다. 개교에 관한 내용은 1909년 1월 12일부터 14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광고 기사에서 확인할 수있다.
기사에는 보성학교 설립과 기부 의연금을 낸 이들의 명단이 자세히 실려 있다. 초대 교장으로 경찰 관료 출신 박한필을 위촉했고 성수원과 최봉순이 가장 많은 30원을 의연금을 납부했다고 소개한다. 정확한 학교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의연금을 내 이들 중 가장 많은 수(18명)가 속한 일산동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보성학교라는 교명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많은 사립학교에서 사용해 눈길을 끈다. 맨 처음 보성학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것은 1905년 4월에 개교한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로 고종황제가 직접 이름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보성전문학교가 최초의 근대학교는 아니지만 개교한 시기가 일제의 압박이 거세진 때였다. 고종은 일제의 초등교육기관 ‘보통’이란 말 대신 ‘널리 인간성을 이룬다’라는 뜻의 보성을 모든 단계의 교육기관에 쓰길 원했다.
동면에 세워진 보성학교도 그런 의미로 학교 이름을 정했고 두 번째 학교 개교 때도 같은 이름을 쓴 것이다. 1차 보성학교가 폐교한 정확한 사유는 확인할 수 없지만 1910년부터 기존에 설립된 수많은 사립학교가 폐교하거나 공립학교로 전환한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전국적으로 1910년 1973곳이었던 사립학교는 1912년에 이르면 1317개로 감소했다. 조선총독부가 ‘사립학교령’을 개악해 신규 설립 때 총독부 인가를 받게 하고, 기존 학교도 교육내용과 교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탄압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성세빈과 2차 보성학교 개교 과정
1차 보성학교가 폐교한 시점은 대한제국이 패망하고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세워 식민 통치에 들어간 초기였다. 그 뒤로 일제의 군대를 앞세운 무단통치가 강화되었고 교육, 문화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폭압 통치가 이루어졌다. 일제 검경에 의한 형사처벌과 수감자가 급증했으며 의병운동 세력 등은 국외로 나가거나 광복회 등 비밀결사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변화한 국제정세 이전에 일제에 항거하는 기운이 무르익은 때에 분노가 폭발했다고 봐야 한다.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울산에서는 4월 2일 언양, 4월 4~5일 병영, 4월 8일 남창에서 잇따라 각기 다른 주체들이 주도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동면은 직접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4월 4일 병영 만세운동의 소식이 전달돼 둘째 날 시위에 참여한 이들이 있었다.
동면에서 다시 사립 보성학교 개교를 준비한 것은 3.1 만세운동의 후과라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의 기운이 커졌고, 만세운동 이후 각 지역에 청년운동과 청년회 결성이 연달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차 보성학교를 위해 맨 앞에 나선 성세빈(1893~1938)도 3.1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청년 중 한 명이었다. 집안은 동면에서 제일 부유했으며 부친 성수원이 1차 사립 보성학교 개교 때 의연금을 가장 많이 낼만큼 신망 있는 집안이었다. 일산진의 해초가공과 어업으로 돈을 모으고, 출가 해녀 등을 보호하는 역할도 맡았다. 방어진 일본인 자본과 충돌한 지역 조선인 어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일에도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세빈은 어린 시절에는 조부가 호조참판을 역임했듯 가풍에 따라 한학을 배웠지만, 1차 보성학교 때는 17세 나이로 근대교육의 현장을 바로 옆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1919년 이후에는 조선의 현황을 알기 위해 상해, 일본, 만주 등 각지를 돌아보고 귀향한 후 동면청년회 창립에 나선다.
성세빈이 회장을 맡은 동면청년회는 1920년 4월에 창립했다. 병영, 언양, 울산청년회의 뒤를 잇는 시기였다. 청년회 결성과 함께 2차 보성학교 설립을 목표로 노동야학을 먼저 개설했다. 노동야학 교사는 김천해(1898~?)가 맡았는데 성세빈의 아내 김순희와 사촌이었다. 김천해는 1922년에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야학을 지도했다. 보성학교 설립에 뜻을 모은 동면청년회 주요 회원은 박학규(1892~1950), 장인두(1899~1950), 성세륭(1903~1958) 등이다. 이들은 노동야학부터 개교까지 학교 부지와 교사 건립, 운영에 나섰으며, 가장 많은 부분은 성세빈 집안이 맡았다.
2차 보성학교 개교는 1922년 경상남도에서 사립강습소로 정식 인가를 받은 뒤 같은 해 5월 1일에 이루어졌다. 설립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가 당시 ‘보성학교 학칙’에 기재된 정원은 학년별 60명에 총 6년제였다. 1년 뒤 신문 기사를 보면 학생 160명에 여학생이 수십 명에 이른다.
사립 보성학교가 민족교육기관으로서 갖는 의미는 동면 유일의 사립학교이자 노동야학과 여성야학을 동시에 운영한 데 있다. 설립인가 당시 동면 지역의 공립 교육기관은 사립 개운학교에서 전환한 동면공립보통학교와 방어진의 일본인 아이를 대상으로 한 방어진심상소학교 두 곳뿐이었다.
보성학교는 1차 개교했다 강제 폐교된 이후 인근 학생에게 끊겼던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야학을 통해 무산자 교육에 나설 뿐 아니라 여성 교육까지 포괄했다. 학칙에도 ‘필요에 따라 야간부를 설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고, 설립 인가 전부터 운영한 노동야학에 이어 1924년 2월에 여성야학을 새롭게 개설했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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