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문화 콘텐츠로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연간 관객 수 2억 명을 넘었다. 박찬욱·봉준호 감독 등이 칸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작품상 등을 휩쓸며 K무비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도 나오는 등 글로벌 영향력이 확대됐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영화는 관객 수가 반 토막 나면서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대중의 감수성을 영리하게 파악한 웰메이드 영화들을 뚝심 있게 제작해 ‘서울의 봄’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하이브미디어코프는 얼어붙은 한국 영화 시장에 봄을 안겨줄 회사로 꼽힌다. 창립한 지 10년 만에 ‘내부자들’을 비롯해 ‘남산의 부장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덕혜옹주’ ‘천문:하늘에 묻다’ ‘핸섬가이즈’ ‘보통의 가족’ ‘말할 수 없는 비밀’ ‘야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고 최근에는 드라마 제작에도 나섰다. 시각특수효과(VFX)·컴퓨터그래픽(CG) 자회사인 스튜디오하이는 애니메이션 제작도 준비하고 있다. 하이브미디어코프는 영화 제작에서 시작해 드라마·애니메이션까지 종합 영상 콘텐츠 기업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김원국(사진) 대표는 2014년 하이브미디어코프를 창립하면서 내놓은 ‘내부자들’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업계에 데뷔했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는 이례적으로 707만 관객을 동원하고 3시간짜리 ‘내부자들-디 오리지널’이라는 감독판 개봉까지 결정하면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창립작부터 흥행 대박을 터뜨리며 10년 만에 국내 톱 영화 제작사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은 김 대표의 치밀한 기획력이다. CF 감독이 꿈이었지만 험난한 과정에 꿈을 접고 광고 회사를 다니다가 영화 제작사를 설립한 그는 한 달에 영화를 비롯해 비디오를 50편 이상 본 ‘영화광’이다. 머릿속에 그동안 본 영화의 흥행 코드 등이 빅데이터화돼 있어 업계에서는 그를 ‘영화 인공지능(AI)’으로 평가한다. 김 대표는 “20대 때 비디오 시장이 활짝 열렸고 붐이 일었다”며 “영화와 비디오를 정말 많이 보다 보니 데이터가 쌓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 기준으로 좋은 영화, 재미있는 영화는 ‘텐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있는 영화”라며 “중간에 휴대폰을 볼 여유를 주지 않고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텐션’이 살아 있는 최고 작품 중 하나로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를 꼽았다.
‘서울의 봄’을 비롯해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 ‘하얼빈’ 등이 역사·장르물인 까닭에 취향이 치우친 게 아닌가 싶지만 그는 “모든 장르를 편견 없이 많이 본다”며 “영화 제작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이들에게 무조건 그냥 많이, 정말 많이 보라고만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20대를 보냈던 1990년대는 영화 제작이 자유화되고 외화 직접 배급이 시작되면서 비디오 시장이 급성장했다. 발전하기 시작한 영화 시장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인 그에게 영화 제작자로서의 DNA가 장착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다.
많이 보는 것 외에 긴 호흡을 갖고 치밀하고 집요하게 기획을 한다는 점도 잇달아 흥행작을 내놓는 비결이다. 그는 “어떤 기획으로 작품을 하겠다고 결정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예를 들어 ‘서울의 봄’은 10년이 소요됐고 ‘야당’도 5년 이상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서울의 봄’은 10년을 공을 들였기 때문에 그렇게 재미있는 작품이 나온 것 같다”며 “그냥 계속 하는 거다. 이 작품만 하는 게 아니라 안 풀리면 다른 것부터 하고, 다시 보고 또 고치는 작업을 오랫동안 한다”고 덧붙였다. 이달 16일 개봉해 ‘내부자들’과 비슷한 흥행 속도와 패턴을 보이고 있는 ‘야당’도 황병국 감독에게 제안한 2021년 이전에 야당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야당은 마약판의 브로커를 뜻하는 은어다. 김 대표는 “황 감독에게 관련 기사를 몇 개 보내주면서 영화화하면 재미있겠다고 제안했다”며 “이 작품을 내놓기까지도 몇 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기획 기간이 길어지면 트렌드와 멀어지는 리스크가 있지만 ‘야당’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서 마약 범죄가 급증해 오히려 트렌드에 정확하게 올라탄 케이스가 됐다. 그는 “약간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냥 운이 좋았다”며 “중요한 것은 기획의 완성도”라고 강조했다.
‘야당’이 개봉 첫 주부터 관객 78만 명을 동원해 올해 실적에 청신호가 켜진 것 같다고 하자 “첫 주에 100만 명을 기대했는데 그에 못 미쳐 다소 아쉽다. 더욱 전사적으로 노력하자고 회의를 계속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실제 관람객이 평점을 매기는 CGV 골든에그지수가 97%를 기록했고 연기·액션 등이 흥행 키워드로 나왔다”며 “더욱 전사적으로 뛰어들어 500만~600만 명까지 관객이 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스토리와 장르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감독에 대한 안목도 김 대표의 빼놓을 수 없는 성공 비결이다. 그동안 봤던 영화들의 데이터를 돌려 가장 적합한 감독을 섭외하고 한번 인연을 맺은 경우 계속해서 작업을 함께하는 편이다. ‘서울의 봄’을 김성수 감독에게 맡긴 이유는 남성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다룰 수 있어서라고 했다. 그는 “‘비트’ ‘태양은 없다’ ‘아수라’ 등 남자들의 욕망을 그린 작품을 주로 연출한 김 감독이 한국에서 남자 배우를 가장 잘 아는 감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며 “김 감독과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과 배우들의 연기, 후반 작업의 결과물을 보고 영화가 흥행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설명했다. 창립작 ‘내부자들’ 등 수많은 작품을 함께한 우민호 감독에 대해서는 “‘파괴된 사나이’에 처음 투자를 하면서 우 감독을 알게 됐다”면서 “치밀하고 화끈하며 영화적 감각이 뛰어난 감독”이라고 밝혔다.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아해 ‘덕혜옹주’와 ‘천문’의 연출을 제안했다. 신인 감독과도 작업을 하는 편이다. 그는 “현장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면 제 능력 안에서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개봉한 하이브미디어코프의 올해 첫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등 흥행에 성공했고 ‘야당’도 청불 신기록을 세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 대표는 올해 라인업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면서 매출 1000억 원에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수준인 10%를 전망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매출은 800억 원이었다.
김 대표는 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구체적 일정이나 계획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3년 안에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서울의 봄’ 같은 히트작을 50편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이어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며 “애니메이션을 더욱 보강해 아시아의 디즈니 같은 회사로 키우고 싶다”고 강조했다. 콘텐츠 사업 외에도 식음료(F&B)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할 계획도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먹는 것, 만드는 것을 좋아해 관심도 많다”며 “건강한 패스트푸드 사업을 해보고 싶고 아이템도 있다”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하이브미디어코프를 ‘아시아의 디즈니’로 성장시키겠다는 김 대표는 애니메이션 제작 외에도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해외시장 진출을 확대할 방침이다. 봉 감독의 차기작도 애니메이션인 데다 최근 북미에서 개봉해 10일 만에 642억 원의 매출을 올린 ‘킹 오브 킹스’의 흥행에 힘입어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애니메이션이 K콘텐츠가 글로벌로 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며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기획력과 스토리텔링 실력으로 TV 애니메이션부터 극장 애니메이션까지 정말 많이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이브미디어코프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국내 영화를 비롯해 콘텐츠 시장은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김 대표는 중국의 한한령 해제에 대한 바람을 내비치며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인구 14억 명의 중국이 다시 열린다면 엔터테인먼트 업체들에도 반전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중국 시장이 열리면 콘텐츠 기업에 커다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며 “중국은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폭이 넓다”고 말했다. 이어 “한한령으로 중국과 비즈니스를 한 지 오래돼 플레이어들도 많이 바뀌었는데 최근 중국 측과 사업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호러물과 가족 영화가 인기 있는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시장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는 “‘7번방의 선물’은 인도네시아에서 속편까지 리메이크됐다”며 “가족·공포 영화 등 진출할 작품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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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생 △연세대 의류환경학과 △광고 기획 및 영화 수입 배급 △2014년~ 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