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차례를 지낸 뒤 가족들과 둘러앉은 밥상머리에 반주 한잔이 빠지면 서운하다. 올 설 명절 기자의 식탁엔 우리술, 그중에서도 푸른 뱀의 해를 맞아 병에 뱀 문양이 그려진 리미티드 에디션(한정판) 증류식 소주가 올랐다. 깊은 향과 깔끔한 풍미가 일품이었다. 연초부터 식탁에 술을 놓은 건 쌀 소비 확대에 작으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최근 농협경제지주와 전통주 제조업체 ‘화요’ 간 업무협약 체결 현장을 취재하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알코올 함량 25도 기준으로 증류식 소주 100㎖를 만드는 데 70g의 쌀이 쓰인다는 것이다. 밥 한공기에 들어가는 쌀이 100g이라면 375㎖들이 술 한병을 마시면 밥을 두 공기 반을 먹는 것과 진배 없는 셈이다. 증류식 소주엔 탁주보다 7배 많은 쌀이 사용된다.
농협이 화요와 손을 맞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쌀을 더 팔아볼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전통주, 그중에서도 증류식 소주에서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쌀을 팔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개척해보겠다는 몸부림으로 보여 애처로울 정도다. 그래도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한사람으로서 농협의 선택이 옳다 싶은 건 증류식 소주시장의 잠재력을 몸소 느끼고 있어서다.
코로나19 이후 증류식 소주시장은 MZ세대를 중심으로 대폭 커졌다. ‘힙한’ 래퍼가 강원 원주의 쌀을 활용, 증류식 소주를 개발해 내놓자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을 우리는 목도했다. 지금도 마트에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 한정판 제품이 입고되면 며칠 안에 금세 동이 날 정도로 마니아층이 두텁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9년 384억원에 불과하던 증류식 소주시장 규모는 2022년 1412억원으로 3년 새 4배 가까이 뛰었다.
이들의 만남이 기대되는 것도 그래서다. 농협과 화요가 지역별·품종별 쌀의 특색을 살린 제품을 내놓으면 쌀 소비 확대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고품질 쌀로 만든 좋은 술이 늘어나면 전통주 산업도 활기를 띨 것이다.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전통주의 고루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소비층을 넓히는 게 첫번째다. 부르기 쉽도록 이름을 고쳐 다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마침 농협도 명칭 관련 연구용역을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술을 또 하나의 ‘케이푸드(K-Food·한국식품)’로 만들기 위해 정부·업계·생산자·전문가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김인경 산업부 차장 why@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