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일(현지 시간) 노벨경제학상 발표를 끝으로 대망의 올해 노벨상 선정 작업이 마무리됐다. 올해 노벨상 발표에는 관심을 모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이 불발된 가운데 마지막 날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잇따라 미국의 관세 정책을 비판한 점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기업의 혁신이 어떻게 장기 성장에 도움을 주는지, 지속 가능한 경제가 어떻게 구축됐는지를 수리적, 역사학적으로 규명한 석학들이라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 강화와는 대척점에 선 인물들이기에 더 주목도가 높았다.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 성과는 통상 현 글로벌 경제 정책을 평가하는 ‘시대 정신’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이 한 동안 학계의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모키어·아기옹·하윗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파괴적 혁신, 지속 성장 연구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13일 “기술 발전과 혁신을 통한 지속적 성장 이론을 정립한 공로가 있다”며 조엘 모키어(79)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필리프 아기옹(79) 콜레주드프랑스 경제학과 교수, 피터 하윗(69) 미국 브라운대 교수를 올해의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세계는 역사상 처음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다”며 “올해 경제학상 수상자들은 혁신이 어떻게 더 큰 진보를 위한 원동력을 제공하는지 설명했다”고 설명했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혁신’과 ‘성장’이었다. 인공지능(AI)과 같은 혁신 도구가 또 다시 전 세계 경제를 흔드는 상황에서 이 같은 기술이 어떻게 부(富)와 성장으로 연결되는지, 인류의 번영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그러낸 학자들을 재조명한 셈이다.
수상자 가운데 모키어 교수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스라엘 히브리대, 미국 예일대 등을 거치며 학·석·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사학자다. 그는 역사적 자료를 활용해 어떻게 경제 성장이 지속 가능해졌는지 그 원인을 밝힌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모키어 교수는 인류가 지난 200년 동안 과거와 달리 과학적·기술적 지식의 상호작용을 통해 꾸준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고 분석했다. 기술 혁신이 서로 연결되고 축적되는 연속적인 개선·응용 과정에 주목했다.
하윗 교수는 캐나다 태생으로 미 샌타바버라대와 브라운대 등을 거치며 거시경제학을 연구한 학자다. 1987년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방문교수 시절 아기옹 교수와 의기투합해 ‘창조적 파괴’ 이론으로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계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내생적 성장 이론’을 1990년대 초반부터 계승 발전시켰다. 특히 창조적 파괴 개념을 현대 수리경제 모형으로 부활시켜 기업 간 경쟁과 혁신이 장기 성장의 원동력임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윗 교수는 하준경 대통령실 경제성장수석의 브라운대 박사 학위를 지도한 스승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기옹 교수 역시 하윗 교수와 같은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다. 아기옹 교수와 하윗 교수가 1992년 공동으로 발표한 ‘창조적 파괴를 통한 성장 모형’ 논문은 기업들이 연구개발(R&D)을 통해 더 나은 신제품과 생산 공정을 만들어내면서 기존 기술·상품을 밀어내는 경쟁 과정을 아기옹·하윗 모형이라는 수식으로 풀었다. 아기옹 교수는 2021년 한국은행과의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가 ‘투자 주도 성장’에서 ‘혁신 주도 성장’으로 전환했음을 사업장 단위 미시 자료로 실증하는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의 시상식은 스웨덴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 열린다. 올해 상금은 분야별로 11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6억 4000만 원)다. 경제학상 상금은 모키어 교수가 전체의 절반을 갖고, 아기옹·하윗 교수가 나머지 절반을 나눠 갖는다.
“트럼프 관세는 혁신의 장애물” 한목소리…“한국, 대기업 독점과 저출산 문제 풀어야”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목된 석학들은 수상 첫날 입장 발표와 취재진 질의응답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관세 정책을 비판해 특히 이목을 집중시켰다. AP·AFP·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아기옹 교수는 이날 취재진과의 전화 통화에서 “미국의 보호주의적 방식을 환영하지 않는다”며 “세계의 성장과 혁신에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기옹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부과한 고율 관세의 위협을 경제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거론하면서 “개방성이 성장의 원동력이고 이를 방해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성장의 장애물”이라고 강조했다.
하윗 교수 역시 이날 노벨경제학상 수상 발표 직후 브라운대가 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관세가 올라가 무역이 제한될수록 시장 크기가 감소하기 때문에 혁신을 할 동기가 줄어든다”며 “개방적인 무역 정책을 유지하고 기존 산업을 선도하는 기업은 너무 보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모키어 교수는 이날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가진 노벨경제학상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관세는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국경을 열어두고 세계의 최고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로 개방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수상자들은 한국의 경제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호평을 내렸다.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달성이라는 두 마리 토기를 모두 잡은 선진국가로 도약한 점을 특히 높이 평가했다.
모키어 교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과 관련한 발언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며 “기술 혁신 측면에서 한국의 수준을 걱정할 이유가 없고 지금까지 한 것을 지속하면 된다”고 격려했다. 모키어 교수는 “한국이 1950년대 매우 낮은 소득의 국가에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평화로운 나라 중 하나로 성장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라며 “내가 걱정하는 국가는 북한, 미얀마 등과 같은 국가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제도에 대한 강의에서 늘 한국과 북한을 비교한다”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면 나라가 훨씬 더 잘살게 되고 형편없으면 매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다만 혁신을 저해하는 대기업의 독점적 시장 지위와 심각한 저출산 문제는 한국의 경제 성장 가능성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하윗 교수는 한국의 성장 둔화에 대한 해법을 묻는 질문을 받고 “선도 기업들이 혁신을 계속할 유인을 가질 수 있도록 독점을 규제하고 경쟁적 시장 환경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답했다. 하윗 교수는 “만약 어떤 산업에서 기존의 선도 기업들이 경쟁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이를 억누르는 것이 더 쉽다고 판단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람 “혁신 유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반독점 정책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윗 교수는 또 기술 발전이 경제 성장을 이끌기 위해서는 대학 연구, 기업의 연구 개발(R&D), 정부 지원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며 “농업혁명, 2차 산업혁명, 정보기술혁명 등 역사적 기술 도약의 순간마다 정부·대학·기업 간 협력이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모키어 교수는 “한국은 지구상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라며 “한국은 인구통계적 문제를 제외하고는 성장이 지속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보이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이뤘다”고 평가하면서도 “언론의 자유, 자유롭게 선거를 치를 수 있는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AI는 혁명 맞지만…투자 열풍은 ‘닷컴 버블’과 유사”

수상자들은 최근 세계 경제를 뜨겁게 달구는 AI 혁신과 관련해서는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효과에 관한 기대와 인류 소외에 대한 우려, 국가 간 기술 격차를 향한 고려 등을 복합적으로 드러냈다.
모키어 교수는 “AI가 인류를 멸종으로 몰아넣고 지구를 장악할 것이란 생각은 사람들이 디스토피아(부정적인 암흑 세계) 공상과학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이라며 “그런 종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AI가 일자리를 없앨 것이란 의견에 대해서도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며 “AI는 사람들을 더 흥미롭고 더 도전적인 일로 이동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하윗 교수는 최근 AI 투자 열풍이 “우리는 현재 1990년대 통신 부문 열풍과 유사한 성격의 투자 열풍 한가운데에 있다”며 “수많은 기술 열풍은 결국 붕괴로 끝났다”고 말했다. 하윗 교수는 또 “AI는 전기, 증기기관, 정보기술처럼 인류의 또 다른 ‘범용 기술 혁명’이 될 것”이라면서도 “AI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 창조적 파괴 효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엄청난 기술 잠재력 만큼 일자리 파괴 효과도 크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너무 많은 '패자(loser)’를 만들어내면 기술 진보 자체가 정치적으로 저지될 위험이 있으므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규제가 필요하다”며 “기술이 노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기옹 교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유럽이 AI 분야에 강점이 있다며 미국과 중국에 뒤지지 않으려면 이 부분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기옹 교수는 “더이상 미국과 중국에 기술 선도국 자리를 내주거나 이들 국가에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유럽 국가들이 깨달아야 한다”며 “유럽은 경쟁 정책의 명분으로 모든 형태의 산업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데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AI를 비롯해 국방, 환경, 생명공학 등 유럽이 잘하는 분야의 산업 정책들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트럼프는 평화상 불발…‘관세 전쟁’ 비판만 떠안아

한편 올해 노벨상 발표 기간의 최대 핫이슈였던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 도전은 좌절로 끝났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지난 10일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58)를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베네수엘라의 여성 야권 지도자 마차도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철권 통치에 맞서 자유로운 선거와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부르짖 정치인이다. 노벨위원회는 그간 수 차례 자신이 적임자라고 주장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외면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발표를 하루 앞둔 9일에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역사상 누구도 9개월 만에 8개의 전쟁을 해결한 적이 없었다”고 자화자찬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르완다, 이스라엘·이란, 인도·파키스탄, 캄보디아·태국, 세르비아·코소보, 에티오피아·이집트 등 기존 7개 분쟁 중재에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가자지구 평화구상 1단계 합의 업적을 성과로서 스스로 추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일 백악관에서 취재진과 만나 노벨평화상 수상 불발에 대해 질문을 받고 “우리가 정말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노벨위원회)이 (나를 선정)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며 “하지만 난 수백만의 생명을 구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답했다. 또 “그건(올해 노벨평화상) 지난해에 (한 일에) 대해 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난 대선에 출마하고 있었다”며 임기 내 추가 도전 가능성을 열어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8년에도 북미 정상회담을 이유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바 있다. 또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바레인·모로코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한 ‘아브라함 협정’ 체결에 대한 공로로 2020년과 2021년에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노벨상 수상 기간 평화상은 얻지 못하고, 자신의 무역 정책과 결이 다른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성장 이론만 얻게 됐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경제학상 수상 정도로 자신의 무역 정책의 방향을 바꿀 가능성은 적겠지만, 당분간 관세 부과가 인류 경제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론적 지지는 받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스톡커(Stocker)'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투자에 도움이 될 만한 미국의 시장·기업·정책·정치·외교 관련 현장 이야기와 현안 분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구독하시면 유익한 미국 소식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