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의 패러다임 디자인]〈16〉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2025-10-12

추석에 많은 분을 만났다. 불법 계엄에 대한 분노와 삶의 어려움, 두 가지 이야기가 가장 많았다.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란 세력을 완전히, 그리고 신속히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대한민국 혁신과 국민행복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40대 사망 원인 1위가 암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사실도 화두였다. 삶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이 밖에도 많은 대화가 오갔다. AI가 무섭게 밀려오고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로봇으로 혁신하지 않으면 경쟁력은 유지할 수 있을까. 정년 연장 논의가 나오자,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일자리를 걱정한다. 신산업과 전통산업은 어떻게 타협해서 내 일자리를 만드는가?

서울의 집 한 채가 10억 원을 넘어 20억 원까지 오른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냐. 인생을 집에 저당 잡히고 사는 나라가 나라냐.” 집값 때문에 국민들이 미치겠다고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사교육비다. 국가 예산 100조 원을 쓰지만 사교육비가 40조 원이다. 학교 밖 아이들은 늘고, 10대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이 문제엔 여야가 따로 없다.

정년은 60세인데 연금은 65세부터 나온다. 젊은 세대는 “국민연금, 우리가 낸 돈 받을 수나 있나요?” 묻는다. 하나같이 논쟁적 주제다.

지역균형발전 문제도 터져 나왔다.“남방한계선이 용인, 평택, 천안이다.”즉각 반론이 돌아왔다.“그럼 나머지는 다 죽으라는 거냐.”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외국인 노동자의 필요성과 동일임금 논쟁, 시골에 산부인과 하나 없는 현실과 연관해 “시골에서 어떻게 살라는 거냐”는 분노도 있었다.

지난 대선 때 분당과 강원도를 오갔다. 강원도 면적은 대한민국의 18%인데 GDP는 70조 원이다. 판교가 있는 분당은 170조 원이다. 대타협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절감했다.

정치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다. “내란 문제는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너무 오래 끌지는 말아야 한다.”이런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귀에 남는 말 하나. “이렇게 더 이상 살 수 없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민은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이제 대한민국 혁신을 위해 대타협의 길로 가야 한다.

한국 사회는 갈등의 피로가 임계점을 넘었다. 노동과 자본, 세대와 지역, 산업과 환경 간의 충돌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를 조정하기 위해 2018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출범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사노위는 사회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정부 정책을 사후적으로 설명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이유는 명확하다.대표성, 투명성, 이행력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첫째, 대표성의 협소함이다. 노·사·정 3자 구조에 머물며 정규직 노조와 대기업 중심의 '기득권 테이블'로 인식된다. 플랫폼 노동자, 자영업자, 청년, 지역, 여성, 기술 스타트업 등 새로운 경제 주체들은 거의 참여하지 못한다. 2025년 기준 자영업 비율은 23%, 비정규직·플랫폼 종사자는 40%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구조적으로 배제돼 있다. 사회적 합의는 다양한 주체의 참여 위에서만 가능하다. 지금의 협의 구조는 여전히 20세기 산업사회형 틀에 갇혀 있다.

둘째, 투명성과 신뢰의 결핍이다. 회의록과 의사결정 과정은 비공개다. 합의가 어떤 근거와 수치 위에서 이루어졌는지 국민은 알 수 없다. 그 결과 노사 모두 '정치적 쇼윈도'로 여긴다. 유럽처럼 논의 과정의 데이터, 재정, 법적 효과를 실시간 공개하는 '데이터룸'이 필요하다.

셋째, 이행력의 부재다. 합의안이 국회나 정부로 넘어가면 수정되거나 폐기된다. 법적 구속력도, 이행 평가 제도도 없다. 합의를 어겨도 불이익이 없으니 선언에 그친다. '합의는 있었으나 실현은 없었다'는 냉소가 반복된다.

이제 경사노위는 근본적 혁신 없이는 '합의의 무덤'으로 남을 것이다. 대안은 분명하다. 한국형 대타협위원회로 진화해야 한다. 필요한 조건이 있다.

첫째, 대표성의 확장이다. 노·사·정뿐 아니라 자영업, 플랫폼, 청년, 지역, 시민, 전문가까지 6축 구조로 확대해야 한다.

둘째, 투명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회의록과 재정, 효과분석을 공개하는 데이터룸을 상설화하고, 무작위로 추출된 100인의 시민의회가 논의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셋째, 이행력을 강화해야 한다. 합의안은 국회 자동 상정(패스트트랙)과 예산 연동, KPI별 성과평가 및 '이행점수' 공개를 통해 합의 → 입법 → 실행으로 자동 연결되어야 한다. 합의를 어긴 주체에는 보조금 환수, 조달 배제, 평판 공표 등 실질적 제재가 필요하다.

넷째, 법적 기반을 명확히 해야 한다. 위원회의 지위, 운영, 합의 절차를 법률로 규정하고, 법 통과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는 말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경사노위가 진정한 사회계약의 무대로 거듭나려면 '행동하는 합의기구'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갈등의 함정을 넘어 정의로운 대전환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로 우리는 빛나는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지금 잠재성장률은 1% 수준이다. 사회갈등지수는 세계 2위, 삶의 질 지수는 32위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IMF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금모으기 운동, 벤처 열풍, 코스닥 붐이 있었다. “한번 해보자”는 기운이 있었다. 지금은 사회 전체가 잠잠히 가라앉아 있다.

이제 결단해야 한다. 대타협을 통해 나아가야 한다. 사회적 합의가 가장 강력한 원칙이 되는 나라, 예측 가능한 나라, 신뢰의 나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내란의 상처를 정확히 극복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안정된 시스템 위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이광재 PD(전 국회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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