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EACE OVER WAR: 유럽 9개국, 예술로 그린 평화 선언”
9월 26일 다시 맞은 아침 공기는 초겨울의 문턱을 넘나들 듯 서늘했다.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며, 일행은 한 달여 이어진 여정의 마지막 장을 준비했다. 도시의 빗방울이 퍼포먼스의 긴장감을 대신하듯 차가운 공기 속을 채우고, 거리의 불빛은 그 사이를 반사하며 빛났다.

브라티슬라바에서의 일정은 마지막을 향한 침착한 정리의 시간이었다. 성당에서의 고요한 아침 미사, 각자의 사색과 회복의 시간, 그리고 퍼포먼스를 위한 토론까지 모든 것이 마지막 무대를 향해 마음을 모으는 과정이었다. 공연 전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주저앉았을 때도, 서로의 손끝과 호흡으로 회복하며 다시 중심을 잡았다. 예술의 여정은 몸의 한계와 마음의 진동을 동시에 통과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었다.
공식적인 마지막 퍼포먼스는 9월 28일 작은 광장에서 열렸다.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각국의 언어로 적힌 평화의 메시지가 하나씩 읽혀졌다. 시민들은 다가와 자신의 언어로 마음을 남겼다.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 ‘전쟁의 종식을 바라는 인류의 공통된 바람’이 언어를 넘어 전해졌다.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9개국, 31일의 대장정을 마친 일행이 다시 도착한 곳은 폴란드 바르샤바다. 출발점이었던 도시에서 여정을 마감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올드타운 광장에서 작성된 평화선언문은 대장정의 공식적인 마침표가 되었다. “패권과 욕망이 만든 전쟁이 사라지고, 이해와 배려의 시대가 오기를”이란 문장을 미리 적어 놓으면서 우리의 시간을 고한다.

귀국 전날, 첫 만남의 인연이었던 킹가를 초대해 마지막 만찬을 나눴다. 영일 선생의 김치찌개는 현지의 친구들에게 ‘따뜻한 한국의 맛’으로 기억되었고, 지환 선생은 킹가의 초상화를 그려 고마움을 전했다. 만남은 작별로 이어졌지만, 그 작별은 또 다른 시작의 약속이었다.
10월 1일, 마지막 퍼포먼스의 무대는 바르샤바 올드타운의 지그문트 3세 동상 앞이었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서로의 손으로 현수막을 붙들고, 익숙해진 협업의 호흡으로 평화를 주제로 한 즉흥 퍼포먼스를 펼쳤다. 선언문이 낭독될 때 광장에 멈춰 선 시민들이 눈빛으로 호응했고, 작은 분수광장에서는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평화를 기원했다.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깊었다. 그날의 바람은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징표’로 남았다.
이튿날,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일행의 표정엔 긴 여정을 마친 이들의 고요한 안도감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10월 3일 새벽, 인천공항에 미끄러지듯 내려앉은 순간은 다시 ‘동방으로부터’의 시간이 되었다.

“PEACE OVER WAR.” 35일간, 9개국을 순회하며 예술로 외친 평화의 울림은 그렇게 하나의 여정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우리의 이야기는 빛으로, 몸짓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이어온 평화의 기록이다. ‘동방으로부터 시즌2’는 그렇게 유럽의 하늘 아래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이제, 다음 이야기는 또다시 ‘사람과 평화’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完)
글·사진 = 심홍재 한국행위예술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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