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의 시대, 클릭 몇 번으로 세상 일 다 알고 해결 가능하다 여겼나. 허나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경험한다. ‘앞으로 어찌 될까?’ 또한 마찬가지.
클릭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유와 다음에 오게 될 세상을 짐작하는 것에도 클릭은 역시 무능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클릭 밖에는 방법을 가지지 못한 것인가.
스마트폰이 대신 해준다고 여겼겠다. 뭐든 치면 나오지 않던가. 이제 인공지능(AI)까지 ‘거인의 어깨’를 가볍게 밟고 날아오르는 듯, 심지어 그걸 만든 이들마저 당황하는 모양새다.
어떤 낱말이 어찌하여 저런 뜻을 가지게 됐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저 스마트한 장치들이 어원풀이도 꽤 하더라만, 한계 있더라. 기왕의 자료를 긁어모아 해(解 풀이)와 답(答 대답)을 내는 것이니 아직은 불가피하리라.
‘짐작’을 예로 들자. ‘사정이나 형편 따위를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이 사전의 풀이다.
15세기 옛 문헌에서 그 활용의 초기 사례가 보이는 한국어인 짐작은 왜 저런 뜻을 갖게 됐을까? ‘짐작’에 ‘한국어’란 앞말을 붙인 건 ‘한자를 속뜻으로 하는 우리말(어휘)의 한 갈래인 한자어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의도다.
대다수(大多數)가 짐작(斟酌)하는 대로 한국어(韓國語)에는 한자어(漢字語)가 상당수(相當數)다. 저 한자를 염두(念頭)에 두고 궁리(窮理)하지 않아도 의미(意味)를 추측(推測)할 수는 있다. 허나 속뜻을 부담(負擔 짊어짐)하는 한자를 안다면 그 뜻을 대(對)하는 마음이 은근(慇懃)해지고 더 깊어진다.
의도적으로 한자를 병기(倂記·나란히 씀)했다. ‘춘향전’에 익살스럽게 나와 우리에게 익숙한 말인 ‘문자 속’이 드는 것이다. 쓰고 읽지는 못해도, 한자가 한국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안다면 글을 마주하는 마음이 밝아지고 편안해 진다. 한자와 문자(文字)는 같은 뜻이다.
술 따를 斟(짐)과 술 따를 酌(작)의 합체인 斟酌이 저런 뜻의 바탕이었다니 뜬금없다는 생각도 든다, 술 따르는 것이 짐작(궁리 또는 추측)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람?
‘두텁다’ ‘즐겁다’는 뜻 심할 심(甚)자는 술을 빚었던 뽕나무 열매 오디(葚 심)의 뜻이니, 곧 술의 비유다. 국자(구기)나 분량을 재는 말 두(斗)와 합친 斟(짐)은 그렇게 하여 ‘(술을) 따르다’는 뜻이 됐다.
술 또는 술통의 의미인 닭 유(酉)자와 국자 즉 구기 작(勺)을 합친 따를 작(酌)자가 짐(斟)자와 짝이 돼 이런 유서 깊은 말이 됐다.
풍진(風塵·바람에 날리는 티끌) 세상 다 잊어버리자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목욕재계와도 같은, 천지신명(天地神明) 즉 세상 조화를 빚는 신령(神靈)을 향한 제사의 절차 또는 (마음)자세였다. 그 전제는 당연히 겸손한 경건이었으리라.
소주병처럼 속보이는 용기는 당시에 없었으리라. 도자기 술병을 잡고 신령님의 잔이 넘칠까봐 조심스레 따르는 모습이 짐작이다. 클릭하듯, 쉽고 부담 없이 추측하고 질러버리는 것이 아니다. 세상 이치와 사람들의 따뜻한 공동체를 염원하는, 합장하고 비나리를 바치는 뜻이다.
세상 어디건 그 염원은 간절하다. 서양산 인도산 박래품(舶來品) 종교라고 다를 것인가? 짐작의 본디를 되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