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미국 외교관의 대원군 관찰기

2025-01-16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몇 년 동안 연재한 적이 있다. 올해 책으로 펴내기 위하여 관련 자료를 재검토하는 중이다. 자료가 뜻밖에 많다.

첫째는 그가 고국의 가족에게 보낸 서신이다. 1884년 5월부터 1887년 7월까지 그는 우편선이 있을 때마다,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 전 상서를 썼다. 이 기간은 그가 조선살이를 한 기간이다. 그러니까 그는 개항초기 3년 동안의 조선 견문록을 사신으로 남긴 것이다.

둘째는 조선 여행기다. 1883년 6월 조선 땅(부산)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관찰과 소감, 그리고 1884년 가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행한 내륙 여행에 대한 세밀한 여행록이다.셋째는 외교관으로 3년 동안 조선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외교부서와 주고받은 공문이다.넷째는 서울 근무하면서 본국 정부와 주고받은 공문서다.다섯째는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상의 기록물은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전해 온다. 단지 서로 다른 나라의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내용이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소중하고 값진 자료와 정보가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 조지 포크에 대해서 뿐 아니라 조선의 1880년대 시공간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그의 1885년 10월 13일 자 편지 일부를 소개해 본다.

서울 미국 공사관

1885년 10월 13일

그리운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에게

저는 건강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저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저를 해임하는 문제를 완전 방치한 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매우 울적하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을까요?

그런 와중에 우리 정부는 제게 공문을 하나 보내왔답니다. 그 요지는 20년 전에 조선인들이 파괴한 제네럴 셔먼호에 대한 배상금을 조선으로부터 쥐어짜내라(squeeze out)는 것입니다. 저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조선이 배상할 일도 아니고 배상하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셔먼호가 조선에 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게다가 셔먼호가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그들이 위해를 가하러 온 줄 알았다는 점에 이론이 없습니다. 셔먼호 사람들은 첫 침략자들(fist agressors)이었습니다. 쌍방에서 발생한 생명 손실 등 피해의 책임을 따진다면 오히려 미국 쪽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 조선은 지금 매우 흥분된 분위기랍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답니다. 그는 수많은 기독교인과 기타 인명을 살상한 잔혹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는 왕비를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민씨 세도를 척결하고자 1882년 군인들의 반란(임오군란)을 사주하였고 거의 성공할 뻔했습니다. 그 순간에 청나라 쪽이 그의 덜미를 잡아끌고 청나라로 압송해 갔답니다. 그런 그가 40명의 청국 해병의 호위 속에서 귀국한 것입니다. 그날 제물포에는 대원군의 귀국을 축하하기 위하여 8천 명가량의 조선인들이 몰려들었답니다. 한편 그의 아들인 국왕은 남대문에 조성된 단으로 나아가 대원군을 정중히 맞이하였습니다. 거리는 온종일 흥분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지요.

항간에 풍설이 난무했답니다. 백성들이 대원군을 받들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기 중국인과 조선 정부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피난을 떠났고 정부는 개점 휴업상태에 빠졌지요. 대원군은 철저히 감시당했고 무슨 사고가 발생하진 않았답니다.

한편, 민비는 대원군이 환국한 지 불과 이틀 후에 3명을 처단토록 했답니다. 희생자들은 3년 전 임오군란 때 대원군의 반란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처단한 것은 분명 대원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였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타올랐습니다.

대원군을 만나러 갔는데 뜻밖에도 그가 무척 반색하더군요. 얼마 뒤 그는 행차를 갖추어 답방을 왔고 제게 많은 과일과 견과류를 선물했습니다. 나이가 68살이라는데 실제로는 50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강철 줄처럼 강인하고 말쑥한 인상을 줍니다.

중국과 조선정부는 그를 정치로부터 격리하려고 애쓰지만, 그는 너무 활동적이어서 오랫동안 잠자코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가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면 조선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지금 이 나라에서 강인하고 지적이며 활기에 차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국왕이 고령의 아버지와 대적하고 있습니다. 국왕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배척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조선에 세 개의 당이 있습니다. 곧 국왕당, 왕비(민비)당, 그리고 대원군당. 이런 분열을 틈타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와 계략을 꾸밉니다.

조선의 상황은 개탄스럽습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부재합니다. 왜냐면 청나라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하기 때문이지요. 내놓고 하지는 않습니다. 무력을 사용하거나 무력으로 위협하는 교활한 방식을 구사합니다. 더욱 나쁘지요.

한국은 언제쯤 큰 나라에 주눅들지 않고 진정한 자주 독립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까, 종종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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