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5월, 베를린 광장에서는 반(反)나치적인 도서로 분류된 책들이 불태워진다. 프란츠 카프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의 저서도 이때 태워진다.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미하 울만이 설치한 조형물 ‘도서관’의 안내판에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희곡 <알만조르>의 문장이 쓰여 있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 실로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했다. 서적을 대상으로 한 탄압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일어난다. 당시 책 파기에 동원되었던 한 교사는 당국에서 봉건적, 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한 책들을 재활용하기 위해 낱장을 손수 찢어내야 했고, 2t에 달하는 책이 제지공장 기계에서 휘저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리처드 커트 크라우스, <문화대혁명> 교유서가, 2024, 88~89쪽)
우리는 이를 ‘필화(筆禍)’라고 불러볼 수 있다. 글을 뜻하는 붓 ‘필’에, 재앙 ‘화’를 쓰는 필화는 발표한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 일을 뜻한다. 임헌영 평론가는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필화란 국가폭력의 일종으로, 자기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로이 나타내는 행위에 대해 국가가 가하는 압력과 형벌을 의미하며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필화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특정 시기에만 일어난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박근혜 정부 때 다수의 예술인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사업 등에서 배제되었고 2023년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조제 사라마구, 한강 등의 책이 청소년 유해 도서로 선정되어 경기도 내 학교 도서관에서 폐기되기도 했다. 지난달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이렇듯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표현의 자유란 창작의 윤리를 지키며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권 세력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억압되어선 안 된다. 필화의 역사를 살피면, 검열의 기준은 모호하다 못해 황당하고 상충하기까지 한다. 김유태의 <나쁜 책>(글항아리, 2024)에 따르면, 출간 이래 1988년까지 소련에서 금서였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현재 러시아에서 도리어 권장되는데, 이는 소설이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재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지 오웰의 또 다른 작품인 <동물농장>은 반소(反蘇) 소설로 규정되어 미군정에 의해 해방기 한국에서 출판되는데, 이후 이들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모순을 보인다.(<한국 현대 필화사 1>, 282쪽)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시인 임수생의 경우, 취조실에서 구타를 당하면서 시 ‘지붕’에 나오는 구절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임을 인정하라는 터무니없는 강압에 시달려야 했다.(<한국 현대 필화사 1>, 567쪽) 이 같은 사례들은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작품이 일방적으로 왜곡 및 악용될 수 있고 어떤 작가든 반동분자로 내몰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사 속에서 필화사건은 반복되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발생한다. 자유는 침해당하고 예술은 훼손된다. 그러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필화사건이 거듭된다는 것은 그와 같은 폭압 속에서도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는 사람들의 외침이 절멸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필화’의 한자를 하나만 바꾸면 좋은 글을 의미하는, ‘붓끝에 피는 꽃’이라는 단어 ‘필화(筆花)’가 된다. 붓끝에는 진실을 태우려 하는 불이 따라오기도 하지만, 진리를 머금은 꽃봉오리가 맺히기도 한다. 붓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들이 있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글을 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