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경제적 학대 막을 장치 없어
신체·정신적 약점 이용해 계좌 인출
"정책 차원에서 촘촘한 대책 필요"
#70대 노인 A씨는 치매를 앓다 지난 달 사망했다. A씨의 자녀들은 A씨에 대한 상속권 분쟁을 위해 A씨의 재산을 확인하던 중 통장에 '1만570원'만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여긴 자녀 B씨가 변호인을 통해 거래 내역을 확인하자,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현금입·출금기에서 많으면 일주일에 서너 번씩 500만원에 달하는 돈을 3년여에 걸쳐 반복 인출한 내역이 확인됐다. 문제는 아버지 A씨가 거동이 불가능해 혼자서는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자녀 C씨가 인출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은행권의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이 고령층을 상대로 한 금융착취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에 그치면서 실효성 논란이 나오고 있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가족이 노인의 신체적, 정신적 약점을 이용하는 경제적 학대 사건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현 은행권의 FDS는 보이스피싱 예방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다.
고령자에 대한 경제적 학대를 막을 수 있는 보다 촘촘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령자를 금융착취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법률이 없다. 지난 2020년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지만 고령자 보호를 위한 별도 규정은 포함돼 있지 않다. 현재 은행권에서는 FDS를 운영하면서 이상 거래를 감지해 금융 피해를 막는 자동 시스템을 시행하고 있지만, 주로 보이스피싱 예방을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가정 내에서 고령자 대상 경제적 학대는 꾸준하게 발생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22 노인 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한해 동안 전국 37곳 지역노인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1만9552건의 노인 학대 사례 중 경제적 학대는 397건으로 나타났다. 이 중 가정 내에서 발생한 학대가 312건으로 가장 많았다. 경제적 학대 행위자를 살펴보면 피해자의 아들이 167명으로 42.1%를 차지했고, 노인기관 관계자가 75명으로 18.9%, 딸이 44명으로 11.1%로 조사됐다.
문제는 가정 내에서 발생한 경제적 학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내년이면 고령인구 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고, 2050년에는 고령자 인구가 40%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노인은 가족 구성원이 본인의 명의로 된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계좌 개설을 하는 등의 경제적 학대 상황을 즉각적으로 인지하기가 어렵다. 알게 돼도 상황상 모른척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건강 상의 문제로 가족에게 간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만을 얘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령자의 금융 사각지대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금융 정책 측면에서 촘촘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일정 기간 동안 규칙적으로 큰 금액의 현금이 인출되는 패턴이 발견되면 거래가 중지되거나 본인 확인 절차를 요구하는 등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행권의 FDS 시행으로 예상하지 못한 큰 금액이 인출되는 등 비정상적인 거래가 발견되면 본인확인 절차 등 제동이 걸리지만, 여전히 가족에 의한 금융 착취 상황에서는 빈틈이 존재한다. 은행 CD기에서는 통장 비밀번호와 카드만 있으면 인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창구인출의 경우에도 인적관계를 증명할 가족관계증명서만 있으면 인출이 가능하다.
다른 법조계 전문가는 은행 차원에서 노인의 '자산관리처분 계획'을 사전에 받아 놓는 등 계획을 조율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전했다. 그는 "고령자의 병세가 악화되거나 사망하는 등 유사시 '간병비 목적으로 월 500만원 인출을 허가' 등의 사전 계획을 제출하게 하면 이러한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비대면 금융이 확대되면서 금융 절차가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고령자 금융 착취 등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노인들이 사각지대 속 금융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정책 차원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