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건설현장 추락사.’
안전모 없이 안전 난간 없는 이동식 비계 위에서 미장 작업을 하다 1.88m 아래로 추락한 고 문유식씨(사망 당시 72세)의 죽음은 이 열 두 자로 압축돼 불린다. 건설현장의 수많은 죽음이 대부분 그러하듯 유족은 그 명칭에 채 담기지 못했다. 문씨 유족은 죽음의 사연과 억울함을 품고 거리로 나섰다. 딸 혜연씨(34)도 지난해 1월22일 발생한 사고로 영영 아버지를 잃고 거리로 나왔다. 혜연씨는 안전 조치를 소홀히 한 현장소장과 인우종합건설에 대한 재판이 이뤄지는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정문·후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해왔다. 1심 선고가 있었던 지난 23일에도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중처벌하라’는 팻말을 들고 자리를 지켰다.
재판 과정에서 사측은 안전조치 미비 등 혐의를 인정했다. 하지만 혜연씨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산재를 방치하고도 솜방망이에 그쳤던 기업 처벌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가족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1인 시위는 선고를 앞두고 뜻밖의 난관을 맞았다. 지난 19일 벌어진 ‘서부지법 난입·폭력 사태’ 여파였다. 경찰이 서부지법 입구를 통제하면서 혜연씨는 100여m 떨어진 근처 공원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그는 “재판부에게 목소리를 전하려던 1인 시위인데, 제가 보이지 않으면 판사도 유족을 잊지 않을까 싶더라. 전혀 상관없는 난동 때문에 밀려나 정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난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혜연씨는 여론의 관심이 큰 사안이라 판단한다면 재판부가 사건을 더 중히 다룰 것이라는 기대에 1심 선고일을 알리는 보도자료에 “유가족과 함께 방청해달라”고 적었다.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서부지법 난입·폭력 사태 이후 법원은 외부인 출입을 제한했다. 취재진도 법정에 들어가지 못했다. 혜연씨는 “법정에 우리 가족만 덩그러니 설 생각을 하니, 재판부가 ‘산재는 매일 있는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서부지법은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를 받는 현장소장 박모씨(52)에게 징역 1년을, 산업안전보건법위반 혐의를 받는 인우종합건설에 벌금 2000만원을 선고했다.
문씨는 아내 김영숙씨(72)에겐 든든한 남편, 혜연씨와 그의 오빠에겐 ‘다 주고도 더 주려하던’ 아버지였다고 한다. 30년 베테랑 미장이였던 문씨는 새벽 4시 경기 수원시의 자택을 나서 늦은 저녁까지 일하다 퇴근하곤 했다. “너희에게 짐 지우고 싶지 않다. 우리 걱정은 마라.” 문씨가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2022년 아내가 뇌경색 시술을 받은 후엔 아내를 보살피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먼 노후에 ‘아내와 경치 좋은 곳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게 문씨 꿈이었다고 한다.
혜연씨는 몇 달 전 집에서 아버지와 식사를 하며 나눴던 대화를 거리에서 자주 떠올렸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우릴 키웠는지 알겠어. 아빠가 내 아빠인 게 영광스러워.” 갑작스러운 딸의 고백에 밥그릇만 쳐다보던 문씨는 “해준 게 하나도 없는데, 뭐가 고맙냐”고 무심한 척 말을 받았다. 혜연씨가 “이렇게 키웠으면 됐지 뭘 더 잘해주려고 해? 아빠는 지금도 우리한테 과분해”라고 핀잔을 주자, 그제야 문씨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다”고 답했다고 한다.
혜연씨는 간호사로 일하며 생사를 오가는 이들을 보는 게 익숙했지만 아버지의 산재 앞에선 그러지 못했다. 남 일처럼 느꼈던 산재 사망이 현실이 된 후, 혜연씨는 “사회가 유독 산재 사고에 박하다”고 느끼게 됐다고 한다. ‘기업이나 책임자에게 징역형이 나오긴 쉽지 않다’는 말을 주변에서 수도 없이 들으면서 하게 된 생각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을 지우기 어렵다는 게 말이 되나요.” 1심 선고로 현장 책임자와 기업이 처벌을 받았지만, 혜연씨는 아직 가족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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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 나선 혜연씨를 버티게 한 것은 주변 응원과 지지였다. 동료 간호사들은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병원에 사표를 내려던 혜연씨를 만류했다. “혜연이 싸우고 오게 휴직을 주세요. 돌아올 수 있게 해주세요.” 그들이 나서 병원에 부탁했고 혜연씨는 두 달 휴직을 받을 수 있었다. 딸이 일하는 병원을 자주 찾았기에, 동료들도 문씨를 알았다. “혜연이 볼 때 아버지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더라.” 병원을 찾은 문씨를 볼 때마다 동료들이 농담 삼아 건네던 말이었다.
더는 볼 수 없지만, 마음에 남은 그 눈빛을 동력으로 혜연씨는 버텼다.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압축된 12자 사건명에 한 남성의 30년 노동과 가족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알리기 위해 혜연씨는 계속 싸우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