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에 사는 성미나씨(가명·45)는 이번 설 명절 시댁에 가지 못 할 뻔했다. 전국의 많은 며느리가 겪는 ‘명절 스트레스’나 드라마·영화의 단골 소재인 ‘고부 갈등’ 같은 이유가 아니었다. “이런 식이면 엄마를 못 만날 것 같아.” 갈등은 예상치 못한 데서 터져 나왔다. 예상에 없었던 ‘모자 갈등’, 그 시작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어놓은 12·3 비상계엄에 대한 정치적 견해차였다.
문제의 전화통화는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 구속영장이 발부된 다음날 벌어졌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 대통령 탄핵·퇴진 촉구 집회에 활발히 참여했던 성씨 부부는 그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건 통화에서 무심코 “윤 대통령이 구속되니 좋다”고 말했다. 돌아온 반응은 부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시어머니는 “그게 무슨 말이냐. 계엄이 일어났어야 했다”고 답했다. 이견은 순식간에 다툼으로 번졌다. 부부는 이날 시어머니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이끄는 윤 대통령 지지 집회에 참여해 왔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거길 왜 가는 거예요. 아르바이트비라도 받고 가시는 거예요?” (성씨의 남편)
“아니다. 헌금 내고 가는 거다.” (성씨의 시어머니)
모자가 주고받는 날 선 말들이 성씨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결국 ‘설에 못 가겠다’는 선언으로 전화를 끊었다. 70대인 시부모님이 ‘극우 유튜브’를 즐겨본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갈등이 이렇게 불거질 줄 성씨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머님, 욕도 많이 나오고 별로 좋은 채널이 아니에요”라고 에둘러 관두라 말하긴 했지만 ‘집회 참여’ 수준으로 적극적인 줄도 몰랐다 했다. 우여곡절 끝에 부부는 명절에 시댁을 찾아뵙기로 했지만, 여전히 남편은 “마음을 풀 순 없다”고 말했다. 성씨는 모자의 갈등을 처음부터 몰랐던 척하기로 했다.
가족·친지가 모이는 민족의 대명절, ‘정치 얘기 금지’라는 오랜 불문율은 비상계엄 이후 펼쳐진 초유의 사태들로 더 위태로워졌다. ‘응원봉’과 ‘태극기’ 등 극명하게 나뉜 광장이 설 밥상 앞에서 재연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명절, 정치 견해가 다른 가족을 보러 갈 준비를 마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 사는 김현진씨(가명·29)는 일명 ‘TK(대구·경북)의 딸’이다. “저는 아버지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이번 설, 경북에 내려갈 거예요.” 김씨가 말했다. 그는 매일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걸 정도로 살가운 딸이지만 “(대통령이)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아버지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비상계엄 이후 두 차례 윤 대통령 탄핵 및 체포 촉구 집회에 갔다. 그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자의적 판단으로 비상계엄 조치를 내리는 대통령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 집회에 나갔다”고 했다. 요즘 김씨 부녀는 틈만 나면 정치 얘기를 한다고 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계엄은 잘못이지만 100% 잘못이란 건 세상에 없다. 민주당도 잘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 말이 ‘윤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자신을 향한 변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부녀는 이번 명절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태도를 갖자’는 숙제를 안고 만나기로 했다. 김씨는 ‘아버지니까 더 설득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 마음은 안면이 없는 거리의 시민들에게도 향했다. 김씨는 “이해할 수 없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도 의외로 평범한 개인일 거란 생각도 든다”고 했다. 서울 광화문 집회를 떠나 올랐던 지하철의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태극기를 흔들던 분들이 지하철 옆자리에 앉는 순간, 그냥 옆집 아주머니·아저씨 같더라고요.”
사회가 양극단으로 갈라지더라도, 가족은 안전히 정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집단일 수 있다. 애정이 기반에 깔려 있기에 무시와 체념이 아닌, 대화와 이해로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르다고 절연할 건 아니니까요.” 서울에 거주하는 30대 강지희씨(가명·31)가 말했다. 강씨는 탄핵 찬성 집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믿는 80대 외조부모를 뒀다. 외조부모가 보낸 가짜뉴스 카카오톡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던 강씨는 비상계엄 사태 이후 변했다. “사소한 묵인이 모여 비상계엄에 이른 게 아닌가 싶더라”는 그는 “반대 의견을 가진 이가 있고, 그게 가족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알려야겠더라”고 했다.
강씨는 외조부모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엄에 찬성한다면, 집회에서 군인을 마주하게 될 사람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당신의 손녀딸과 그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7일 ‘대통령 계엄 선포는 국민·국가를 위한 충정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외조부모가 공유했을 때 “어떤 이유든 군사력 동원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맞받았다. 물론 그 이후로도 외조부모는 지치지 않고 정치 관련 메시지를 보내지만, 강씨도 “폭넓은 시야를 가지셨으면 좋겠다”고 꼬박꼬박 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역시 외조부모를 완벽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강씨는 “가족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그룹에서라도 침묵하지 않다 보면 공고해 보이는 생각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명절 강씨는 구태여 정치 얘기를 먼저 꺼내진 않기로 했지만, 답은 하기로 했다. 강씨는 “가족 모임에서 차별적이거나 편견 어린 말이 나온다면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