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노동·교육 오가는 소신 발언
본업인 경기 전망에선 빗나간 예측
통화정책 본연에 묵묵히 집중하길
지나치게 엄숙한 조직 문화 탓에 한은사(寺)라 불려 온 한국은행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파격이다. 본업인 통화정책에서조차 극도로 방어적인 해석만을 내놓던 앞선 총재들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의 발언에는 말 그대로 성역이 없다. 사과값이 급등하자 금리로 잡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며 농산물 수입 개방을 얘기했고, 외국인 근로자를 돌봄 영역에 활용하는 대신 최저 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길도 제시했다.
웬만한 정치인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여론의 역린인 교육 영역에까지 입을 연 건 화룡점정이었다. 서울 상위권 대학들이 학생을 뽑을 때 성적만 보지 말고 지역 비례를 중점에 둬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대학에서 지방 학생을 80% 뽑으면 수도권 집중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며 통념을 깨는 수치까지 내놨다.
오죽하면 출마설까지 나왔을까. 일말의 정치 참여 의지를 내비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끝내 국회 국정감사에서 한은 총재의 선출직 출마 여부를 질의하는 해프닝까지 불거졌다. 그만큼 그가 던져 온 의제들이 사회 전반에 논쟁적인 안건들이었다는 방증이다.
사실 통화정책의 수장인 한은 총재의 위치만 생각하면 경제와 관련된 어떤 대목에도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 보인다.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것만으로 물가를 관리하기엔 숫자로 잡히지 않는 변수들은 너무도 많다. 전직 한은 총재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거침없는 행보에 박수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옳은 말이라고 오지랖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 돈과 연관된 문제라는 명분은 전가의 보도다. 그런 논리라면 한은 총재는 모든 행정의 영역에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한은 총재가 넘을 수 있는 선이 어디까지냐는 의문과 불만이 응원만큼이나 많은 현실이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엇갈린 반응 속에서 그가 점점 한은 밖에서의 메시지로 주목을 받는 인물이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작 한은이 해야 할 본업에서는 동력을 잃고 있는 분위기다.
한은은 최근 경제 진단 능력에서 의문을 사고 있다. 우리나라의 올해 3분기 경제성장률은 0.1%에 그쳤다. 한은의 당초 전망치가 0.5%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일관된 낙관론의 결과였다면 그나마 이질감이 덜했을 수 있다. 반대로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은 1.3%로, 한은 전망치인 0.5~0.6%를 한참 웃돌았다. 다시 거꾸로 2분기 마이너스 성장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총재도 점점 면이 살지 않는 모습이다. 올해 5월까지만 해도 "전망이란 자연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지난 달 국감에서는 "전망이 틀려서 당황스럽고 유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항변처럼 경제 전망을 가늠하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수치까지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묘기에 가까운 일이다. 한은이란 기관의 성격도 경제성장률을 족집게처럼 맞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어떤 조직에서도 수장은 모름지기 결과로 평가받는 자리다. 한은의 경기 예측력은 통화정책의 기반이자, 시장에 던질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시그널이다. 여기부터 균열이 일면 한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 처지가 이렇다 보니 이 총재의 주장도 설득력을 잃는다. 금리만으로는 물가를 잡을 수 없고, 치솟는 집값과 그에 따른 가계부채 확대가 왜곡된 교육 환경 때문이라는 나름 합리적인 제언들도 어딘가 변명이 담긴 볼멘소리로 변질된다.
물론 한은이 홀로 경제를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한은이 모든 일에 간섭할 필요도 없다. 한은은 그저 통화정책의 수립과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임무에만 묵묵히 해내면 될 따름이다. 혹여나 한은 총재가 자신의 권한 밖에서 이뤄보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에 맞는 자리를 꿰차 책임지고 뜻을 펼치면 된다. 한은 총재는 경제 대통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