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대학교 관정도서관 양두석홀 무대에 오른 이윤정양의 손이 떨렸다. 재작년 한국으로 이민 온 중국인 윤정양은 한 손으로 마이크를 꼭 잡고 앞을 바라봤다. 러시아, 스리랑카,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청소년들이 앉아 있었다. 저마다 다르고 또 닮은 얼굴들이었다. 윤정양은 힘주어 말했다. “이민은 도망이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꼭 말하고 싶어요.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이날 서울대 다문화교육연구센터 주최로 열린 ‘제1회 이주배경청소년 이중언어말하기 대회’는 이주 청소년들이 한국어와 모국어로 자신의 이민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해 온 십대 청소년들이다. 윤정양도 한국어로 발표한 뒤 같은 내용을 중국어로 말했다. 한국어를 말할 때 경직됐던 어깨는 모국어로 발표하면서 조금씩 풀어졌다. 33명의 청소년은 말이 멈추고 엉키는 순간들을 서로 기다려주고 격려하며 이민 경험을 나눴다.

이들은 낯선 한국에서 겪은 어려움들을 고백했다. 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판 아나스타실리아양은 “한국으로 이사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내 나라에서 살게 되는 구나’라고 생각했었다”며 “하지만 와서 보니 ‘나는 한국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생각이 들어 서운하고 착잡했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자란 고려인 최빅토리아양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무섭고 힘들어서 학교에 가기 싫었다”며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자신감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모국어와 한국어가 섞인 발표처럼 이들은 자신이 가진 ‘이중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판 아나스타실리아양은 “살다 보니 다르다는 것은 오히려 좋은 것”이라며 “달라서 알고 싶은 것도 배울 것도 많아 사는 게 아주 바쁘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서 온 스네하양도 “나는 한 문화에 속한 사람이 아닌 두 문화를 연결하는 다리 위에서 자라고 있는 사람”이라며 “한국어도 싱할라어도 모두 내 언어”라고 말했다.

대회 참가자들은 한국에 온 지 5년이 채 넘지 않은 ‘중도입국 청소년’들이다. 앞서 열렸던 이중언어말하기대회가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10년 이상 체류한 다문화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는 다르다. 모경환 서울대 다문화교육센터장은 “정착 초기의 낯선 언어와 환경, 문화적 충돌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며 “개인의 경험을 넘어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라고 말했다.
이날 무대에서는 승무원, 변호사, 학자 등 청소년들이 가진 꿈도 울려 퍼졌다. “언젠가 세계의 무대에서 다른 문화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고 싶다”던 윤정양은 또렷한 한국어로 말했다. “상상만 해도 참 멋지지 않아요? 사실 우리 모두는 반짝이는 금 같은 존재예요. 노력만 한다면 자신만의 빛을 낼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