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하’의 시대

2025-03-16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확행’의 시대였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즉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을 일컫는 말로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에서 처음 사용했던 단어다.

그러나 일상에서 쉽게 발견하거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소확행이라 일컫던 작가의 의도와 달리 지금의 소확행은 점점 고가의 물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과시의 장으로 변질되어 갔다.

일상에 지친 나를 위한 선물은 명품백, 열심히 일했으니 휴가는 고급호텔로의 호캉스 등 SNS에 올라온 소확행 관련 콘텐츠들을 보면 과시욕이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소비해서 확실한 행복’으로 바뀌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겼다.

그리고 이제는 ‘아보하’의 시대다.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제시한 개념인 ‘아보하’는 ‘아주 보통의 하루’의 줄임말로 자랑할 만한 물건이나 경험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중시한다. 김난도 교수는 “과시가 아닌 보통의 오늘을 잘 보내고 일상을 회복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보니 요즘 소비 트렌드도 이에 맞춰 변하고 있는 추세이다.

팬데믹과 어려운 경제상황, 그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 이후 복잡하고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소비자들은 더 이상 지나친 사치나 화려한 행복보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안정을 찾고 있다.

이에 따라 요즘 소박하고 심플한 제품, 합리적 가격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 주는 제품과 서비스 등이 인기다. 가성비와 가심비를 모두 만족해야 하는 것. 심플하고 편안한 디자인의 홈웨어, 편안하게 집에서 쉴 수 있게 해주는 가구, 홈 가드닝, 좋아하는 커피 내려 마시기, 음악 들으며 산책하기 등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핵심이다.

대표적인 아보하 트렌드 중 하나가 ‘일기’라고 한다. 일기를 통해 하루를 돌아보고 개인적인 일상을 적어가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네이버가 발표한 ‘2024 네이버 블로그 리포트’에 따르면 지난해 신설된 블로그는 전년대비 70%가 늘었고, 다이어리 시장도 비슷한 성장세를 보이며 한 온라인 편집숍의 12월 한 달 간 다이어리와 노트 거래액도 74%이상 늘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처럼 아보하가 주목받는 이유를 현대인들의 피로감과 불안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어려운 경제상황과 지나친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현재의 위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다 보니 현실을 회피하는 분위기가 이런 유행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들은 행복감과 더불어 걱정과 우울감도 전년 대비 커진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한국행정연구원이 발표한 ‘2024년 사회통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감은 10점 만점에 6.8점으로 전년대비 0.1점 올랐지만 ‘걱정’은 3.4점에서 4.1점, ‘우울감’은 2.8점에서 3.5점 등 부정적 감정의 점수가 더 큰 폭으로 상승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고 그렇기에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내 인생이다. 별의별 사건, 사고를 접하며 지금의 평안에 감사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하루를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가 아닌 나만의 속도에 맞춰 삶을 조율해 가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평범한 일상 속 자신을 위한 소박한 소비, 원하는 가치에 맞춘 라이프 스타일로 비교와 성취의 압박에서 벗어나 심리적 안정을 찾고 스스로 마음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자. 그 과정을 통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충전할 수 있지 않을까.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면의 가치와 신념에 충실한 오늘을 잘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보통의 하루를 응원한다.

유은기 <전북은행 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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