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분홍이 어우러지던 봄 단풍이 끝나고 대기를 점령하던 소나무 꽃가루도 가라앉았다. 밀이 가득 찬 논에는 노란빛이 퍼지고 그 옆 곱게 정리된 논에는 물이 들어차 고요하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얼핏 보면 그렇다. 실상은 전쟁이다. 트랙터 바퀴가 진흙을 공중에 흩뿌리며 다니고 바닥의 잔해들이 처참해서만은 아니다. 논마다 물을 대기 위한 눈치싸움이 치열하고, 때를 맞추기 위해 밤에도 논 작업을 해야 하는 시간싸움이 일상이다. 힘을 써야 하는 힘든 시기이다.
‘보릿고개’도 여전하다. 아직 밀을 거두기 전이고, 첫 밭작물인 감자도 6월 하지쯤에나 수확하다 보니 주머니가 마른다. 이른 봄 비료와 종자를 구입하고 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마을 이장이 주민들에게 신청받아 농협에 신청하고 농자재를 받아 나눠주는데, 농협 대금 결제가 우선이고 수금은 그다음이다. 주민 대부분 바로 돈을 주시지만 몇분은 “미안허네. 곧 될걸세”하며 하세월이다.
하소연하자면 필자의 경제도 넉넉하지 못하다. 논 3000여평으로 얻는 농사 매출은 연 2000만원 정도, 그중 순이익은 마음이 아파서 계산하지 않고 산다. 그나마 친환경 농법이니 비료와 농약 비용은 절약된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부족한 현찰을 메워야 한다. ‘이장 월급’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다. 까놓고 밝히자면 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합쳐 월평균 60만원 정도 된다. 그저 덜 쓸 수 있으니 덜 벌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간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지만 이곳에서는 그 흔한 차량 방송도 잘 듣지 못한다. 선거운동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판단일 테고, 당연하다. 농촌 관련 공약도 예전과 대동소이하고 반복 재생이 많다. 어느 날 휴대폰에서 한 후보의 동영상 하나가 눈에 띄었고 말하는 내용에 귓바퀴가 벌어졌다.
“쌀값이 안정되지 않아서 쌀 산업이 붕괴하거나 포기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지금도 일본의 쌀값이 2배, 3배로 올라가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기후위기로 국제적인 흉작이 발생한다든지 정치적인 이유로 곡물 수입 통제가 이뤄지면 그때 가서 어떡할 겁니까. 쌀은, 농업은 전략 안보 산업인 거예요.”
하고 싶었던 얘기였고 정치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감개무량했다.
“식량 농업이 가진 안보적·전략적 성격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식량은) 가장 강력한 군수물자가 됩니다. 다른 나라는 뭐 하려고 대한민국이 농업에 지원하는 농가당 지원금의 몇배씩을 줘가면서 농업을 유지하냐. 바보라서 그럽니까? 농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전략적 가치 때문입니다.”
그렇다. 농민을 군인 정도로 취급하고 대우해주면 좋겠다. 장교도 아니고 부사관도 아니고 그저 병장 월급 정도만 벌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군인은 숙식도 제공해주지만 그런 건 우리가 감내할 테다. 연설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농업에 종사하는 여러분, 농업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이 나라의 식량 안보를 책임지고 있다, 이 나라의 산천을 지키는 공익의 기여자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음, 그래 뭐, 자부심부터 챙겨야지. 말이라도 고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