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문재인 등 세 명의 ‘진보 대통령’이 있었다. 민주당이라는 뿌리를 같이한다지만 저마다 색깔과 정책이 달랐다. 만약 이재명이 다음 대통령이 된다면 네 번째다. 과연 그는 어떤 정책을 펼까. 경제 쪽에서 비교하자면 문재인에 가까운 반면, 노무현과는 전혀 다른 정책을 펴지 않을까 싶다.
이재명 정책의 트레이드 마크는 현금 나눠주기다. 전 국민을 상대로 100만원씩 주겠다는 것이 지난 대선 때 선거공약의 백미였다. 성남시장·경기지사 때도 비슷한 정책으로 재미를 봤다. 지금도 전 국민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을 위한 추경 편성을 요구하고 있으며, 지역화폐나 재래시장 쿠폰 발행 관련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노무현은 그야말로 정반대였다. 참여정부 국정브리핑 팀이 펴낸 『노무현과 참여정부 경제 5년』에 수록된 실화(124쪽) 를 소개한다.
강용호 남대문시장 대표: “정부의 생계 보조금에 재래시장 쿠폰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
대통령: “좋은 말씀 해주셨다. 시장에서 특별한 대우를 해달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정부에서 채택하기 어려운 정책이다.”(2005년 5월)
이재명과는 너무나 달랐던 노무현의 경제관
노무현과 이재명, 두 정치인의 단순 비교는 무리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분명하다. 참여정부에서 ‘현금 배급’ 건의를 하는 장관이 있었다면 당장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노무현이 내건 거창한 개혁 과제들이 여럿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는다”는 소신이었다. 돈 나눠주기는 고사하고 경기 살리자고 정부 재정 사업을 확대하자거나 은행 돈을 더 풀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질색했다. 주가를 끌어올린다든지, 건설 경기를 활성화하는 방안 등은 아예 말도 못 꺼내게 했다.
노무현의 머릿속에는 지나치리만큼 부양책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정부들은 걸핏하면 주가 부양책을 폈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컸다. 따라서 자신은 결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가 거의 신앙 수준이었다(『노무현과 참여정부 경제 5년』, 101쪽).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전임 김대중 정권이 외환위기 탈출에 급한 나머지 경기 부양 정책을 남발했었고, 그 결과로 부동산 급등과 카드대란이라는 골칫거리를 참여정부에 떠넘겼으니 말이다. 단기 부양책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생각이 노무현 경제의 고집스러운 노선이었다.
더 뿌리 깊은 이유도 있다. 노무현의 머릿속에는 ‘박정희 경제 체제’에 대한 반감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박정희 경제=성장 우선주의’가 부익부 빈익빈, 재벌 특혜, 분배 구조 악화 등을 초래했다고 생각해 온 그였다. 대통령 당선 후 인수위를 구성할 때도 경제 분과 핵심 멤버 대부분이 이정우(경북대) 교수 등 ‘반(反)박정희주의자’들이었다. 박정희가 경제 성장 우선주의를 내세워 장기 독재를 해왔다고 믿어 온 사람들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도 ‘경제성장’ 담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그가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불쑥 “연평균 7% 성장”을 공약했다. 대체 무얼 근거로 7% 성장을 장담했던 것일까. 대통령이 되고 나서 어느 기회에 노무현은 “이회창 후보가 6%를 공약하기에 즉석에서 1%를 더 얹었던 것”이라고 했다. 어이없이 솔직한 고백이었으나 그만큼 ‘경제 성장’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참여정부의 첫 경제부총리로 내정한 김진표와의 저녁 자리 대화의 한 대목도 경제에 관한 그의 기본 인식을 말해 준다.
“다른 것을 다 성공해도 경제에 실패하면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김진표)
“만날 경제, 경제 이야기냐. 나라가 이만큼 먹고살면 됐지, 자주성이나 국가의 품격, 사회보장, 복지, 이런 것도 중요한 것 아니냐….”(노무현 당선자)
일자리 감소가 대통령 변화시켜
취임 첫해, 노무현은 성장 정책에 거리를 두는 경제의 기본 틀을 고수해 나갔다. 설비투자 부진에 대응하기보다는 기업들의 투명 경영 촉구가 먼저였다. 노조의 불법 시위에 참다못해 공권력을 발동했다지만, 참여정부의 기본 노선은 어디까지나 친노조였다.
기업들은 잔뜩 움츠렸다. 정권 초기에 이처럼 재계가 겁먹고 위축된 것은 군사 정권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반면에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다. 대통령이 든든한 빽이 됐으니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이때부터 일기 시작한 반(反)기업 정서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기업 입장에서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의 찬바람이 여전한데, 새 정권이 “똑바로 하라”며 으름장을 놓으니 겁을 먹을 수밖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기업하기 나쁜 나라’라며 한국을 떠나는 외국 기업도 나왔다. 친노조 정책이 이렇게 강력한 나라에서는 투자할 생각이 없다는 인식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랬던 참여정부가 집권 2년 차에 접어들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2004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노무현의 말이다. 성장을 도외시했던 참여정부로서는 뜻밖의 방향전환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생산성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든지, 재계 총수들을 오찬에 초대해 “(나를) 믿고 용기를 내서 투자해 달라. 최선의 서비스를 하겠다. 노사 문제와 규제 문제를 직접 챙기겠다”고 말한 것 등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노무현 경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 집권 첫해는 정신차릴 겨를이 없었다. 개혁을 외치고 각종 로드맵을 쏟아냈지만 SK 사태에 이어 화물연대, 공기업 파업, 전교조 문제 등으로 허둥댈 수밖에 없었던 게 현실이었다. 첫해를 경험한 참여정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경제가 성장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상식이 허물어졌다”고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노무현과 참여정부 경제 5년』,134쪽). 2003년의 경제 성적표를 받아든 노무현은 충격이 컸다. 경제가 3.1% 성장했는데 고용이 늘기는커녕 3만 명이 줄었다는 통계가 믿기지 않았다. 고용 없는 성장이라니….
그러나 참여정부가 몰랐거나 외면했을 뿐,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산업구조 변화가 몰고 온 회오리였다.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경제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고용 효과가 큰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물러가고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집약적, 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바뀌었으니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다만 고용 감소라는 부작용이 이처럼 심각할지 몰랐던 게 문제였다. 결국 경제 지휘권을 이헌재에게 맡겨서 궤도 수정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투수’ 이헌재 기용했으나…
참여정부 경제 정책을 정리함에 있어 노무현과 이헌재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헌재야말로 참여정부의 모든 장관들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었고, 길지 않은 재직 기간 동안 노무현 경제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헌재는 알려진 대로 김대중 정권에서 IMF 위기 극복을 주도했던 능숙한 해결사. 실제로 부총리 취임 이후 참여정부 초반의 난제였던 카드대란과 신용불량자 사태 수습, 일자리 대책 등에 솜씨를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이나 행보는 ‘노무현 경제’를 거스르는 점이 적지 않았다. 명백히 보수 쪽 사람이고 시장주의자다. 노무현도 그 점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2004년 초 정찬용 인사보좌관을 앞세워서 “싫다”는 이헌재를 삼고초려 끝에 경제부총리로 데려왔다. 취임 후 이헌재의 발언이 거침없었던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는 취임사에서부터 노무현이 경계해 온 ‘단기 부양책’을 언급했다.
청와대의 개혁 세력들로서는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니었다. 참여정부의 경제 철학 선생 격인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인 이정우는 노골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성장에 연연해서 개혁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개혁을 통해 성장을 이뤄야 한다. 성장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장기적으로 개혁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하다. 일시적 부양책이나 몇 발짝 못 가서 발병하는 성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2004년 5월 12일).
이헌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청와대와 여의도에 포진한 386그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경제발전의 주역을 맡아야 할 386세대가 1980년대 초 대학 시절 정치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경제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2004년 7월, 여성경영자 모임)
는 말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는가 하면, “한국 경제는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진 환자 같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주역들에게는 죄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었다.
시장은 헷갈렸다.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참모의 말이 다르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참모들만 다른 게 아니었다. 대통령도 그랬다. 때로는 이헌재의 손을, 때로는 개혁파의 손을 들어줬다. 노무현 경제가 극복하지 못한 이중구조라고 할까.
이런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기용된 이헌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구체적 내용은 차치하고 정책을 세워도 일사불란하게 펼쳐나갈 수가 없었다. 걸핏하면 청와대나 여당에서 발목을 잡았다. 양도소득세 인하를 비롯해 종합부동산세 입법, 연금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소위 ‘한국판 뉴딜 정책’ 등 여러 정책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이헌재는 13개월 만에 물러난다. 막판엔 출처 불명의 ‘부동산 투기’ 스캔들로 좌파 언론의 집중 공격까지 받았다. 노무현은 이 부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해일에 휩쓸려가는 장수를 붙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가 놓쳐버린 심정”이라고 했다. 미안했던 것이다. 방대한 분량의 『참여정부 국정운영 백서』에는 어디서도 노무현 경제의 고민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직 집권 기간에 대한 자화자찬 일색이다. 부동산 정책마저도. (부동산 정책은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노무현과 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노무현과의 인연은.
IMF 외환위기 이후 내가 DJ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을 할 때 부산에서 대우조선 사태와 삼성자동차 부산대책위원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노무현을 접촉하면서 호감을 가졌다. 대선후보로 나섰을 때 언론계 출신의 지인과 함께 여러 조언을 했다.
왜 참여정부 두 번째 부총리로 들어갔나.
첫해 조각 과정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지만 고사했다. 대통령 주변 인물들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많기도 했고. 이듬해 초에 정찬용 인사비서관 등 여러 사람의 권유로 입각하면서 연말까지만 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취임사에서 노무현이 금기시하던 단기부양책의 필요성을 언급했는데.
나는 경제부총리의 사명이 단기적으로는 시장관리, 중기적으로는 성장과 고용이며, 그다음에 구조개혁의 틀을 만드는 데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께도 얘기했다. 나는 당시 한국은행이 추정한 잠재성장률 5% 수준을 유지하려면 연간 50만 명 정도 고용이 늘어나야 한다고 봤다.
노 대통령 주변의 개혁파, 386그룹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오버 액션이 있었다. 386이 경제 공부가 부족하다는 얘기처럼 자극적인 말을 굳이 해야 했나, 생각이 든다. 내가 좀 더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노 대통령의 경제 성과도 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노무현과 김대중 정부에서 일했다. 두 대통령의 차이점은.
DJ가 노무현보다는 훨씬 준비도 많았고 생각도 깊었다. 숙성 기간의 차이라고 할까. 노무현은 갑자기 큰 인물 아닌가. 너무 잘하려고 하는데 매몰돼 있었다. 탄핵에서 복귀한 후로는 그런 강박이 더 심해졌다.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그때가 참 좋은 기회였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도 늘려갈 수 있었는데, 개혁 과제에만 집착했던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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