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없는 날들

2025-10-16

내가 평지를 걷고 있다고 하자.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충만한데 자꾸 뒤로만 물러나게 된다면, 이는 분명 절망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면, 그리고 언덕이 아래에서 바라본 너 자신만큼이나 가파르다면, 네가 뒤로 물러나는 것은 바닥의 성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절망할 필요가 없다.

-프란츠 카프카 『위로 없는 날들』 중에서.

폐결핵에 걸린 34살 카프카(사진)가 체코의 시골 마을 취라우에서 요양하며 쓴 단상들을 모은 책이다. 당시 폐결핵은 불치병이었고, 카프카는 결국 40살에 세상을 떴다. 생전의 그는 이 글들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당연히 출간 계획도 없었다. 사후 출간하며 마을 이름을 따서 『취라우 아포리즘』이란 원제를 지었다. 편지지를 4등분한 작은 메모지에 일기처럼 쓴 단상들은, 들쑥날쑥 분방한 사유를 보여준다. 철학적, 신학적 주제에 각종 은유와 우화적 표현 때문에 모호하고 난해한 내용들도 있지만, 병과 싸우며 내면의 어두움, 상처와 대면하는 작가의 육성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한번 지나면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이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마치 가을날의 길처럼, 깨끗하게 쓸어놓자마자 다시금 낙엽들로 덮여버리는 길처럼.”

해설에 따르면 카프카는 1년 남짓한 취라우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회상했다. 작가와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의 충돌, 실패한 연애와 권위적인 아버지로 인한 갈등 등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상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 얻은 행복이라니. 그래서 이런 문장들이 나온 걸까. “의지할 곳이기를 멈추었을 때, 정신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선은 어떤 의미에서 위로가 없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한 행복에 이르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기 안에 파괴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믿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도달하려 애쓰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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