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칼럼] ESG, 폭삭 속았수다?

2025-03-23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제목이 눈길을 끈다. '폭삭 속았수다' 제주 사투리로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왠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이야기와도 절묘하게 겹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업도 투자자도, 정부도 모두 ESG를 외쳤다. '지속가능성'이 마치 새로운 성장 키워드처럼 부각되었고, 돈도 정책도 이쪽으로 몰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금리, 경기 침체, 미국 행정부 교체, 유럽연합(EU)의 지속가능성 정책 변화 분위기 속에서 기후변화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열기가 급작스럽게 식고 있다. “ESG는 끝났다” “한물갔다”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 동안 약삭 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은 아마도 “요 몇 년동안 수고 많았어, ESG야! 안녕~”라고 할 것 같다.

사실 ESG는 어떤 '신념의 유행'이나 '도덕적 명분'이 아니다. 원래부터 기업과 투자기관이 30년 넘게 써 온 비재무 정보 활용의 연장선에 있다. ESG란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통해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리스크를 살펴보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돈 잘 버는 법'을 더 정교하게 따지는 도구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줄 때, 그 사람이 단순히 소득만 많다고 해서 돈을 턱턱 내어주진 않는다. 평소의 성실함, 인간관계, 채무자 가족의 상황까지 살펴본다. 기업 평가도 마찬가지다. 재무제표만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인식은 1990년대부터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군형성과표(BSC, Balanced Scorecard)' 같은 경영 방식이다. 임직원의 학습과 성장, 내부 프로세스, 고객 만족,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경영같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정보'를 기업 경영에 반영하였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BlackRock)을 비롯한 글로벌 투자기관이 ESG를 말할 때, 이는 단순한 사회책임투자(SRI)와는 다르다. ESG는 '착한 투자'가 아니라, 비재무 요소를 투자 판단에 포함시키는 '현명한 투자'다. 리스크를 줄이고 장기적 수익을 높이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ESG가 약해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SG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 지정학적 리스크 등 급변하는 현실에 맞게 '당위 중심의 ESG'에서 '현실 중심의 ESG'로 조정되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언제나 아이의 미래를 생각한다. 일하다 죽거나 병들거나 다치는 직장에 우수 인재를 모으기 쉽지 않다. ESG는 바로 이 보편적 욕구에 기업과 자본이 응답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ESG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다만 과거처럼 '유행'의 언어가 아니라, 경영과 투자라는 현실 언어 속에 더 깊이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 ESG야, 폭삭 속았수다”에 더하여 “앞으로도 많은 수고를 부탁한다. 우리의 번영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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