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4) 〈남정일기(南征日記)〉, 〈갑오실기(甲午實記)〉

2025-02-21

〈남정일기(南征日記)〉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차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 영접사 이중하(李重夏)의 비망기로 ‘남정(南征)’이란 일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쪽 전라도 동학농민군 정벌 관련한 내용 중심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진주한 청국군의 경로와 조선 정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5월 1일 조선 정부는 공조참판 이중하를 대표로 하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통신ㆍ치안 등을 위한 인력과 양식, 우마와 선박ㆍ뱃사공 및 이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적극 협조하였다. 아산에 상륙한 청국군의 인력과 우마ㆍ양식ㆍ선박 제공 등과 관련하여 직명ㆍ용도별 동원 인원 및 금액 지출 내역 등을 매일매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중하는 서울을 출발하여 평택과 둔포를 지나 당일 저물녘에 아산 백석포에 도착하였는데, 아산현감과 온양군수ㆍ직산현감 등이 와서 청국 군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우마와 운송 선박 마련과 제반 응접에 관한 일들을 준비하는 한편, 각 읍에 각별히 경계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다음 날 인천 주재 청국 영사는 영접사에게 태원진 총병 니에시청(聶士成)과 직례제독 예지차오(葉志超)를 비롯한 청국 군대의 도착 일정을 설명하고 아산의 포구는 물이 얕은 까닭에 병선은 앞바다의 내도(內島)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운반할 것이라고 예시하였다.

이후 니에시청의 병선 1척과 소륜선 1척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이중하는 작은 배로 병선으로 가 니에시청과 그 일행에게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하고 잠시 대화하였다. 니에시청 부대의 아산 상륙은 새벽 조수가 밀려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어 작은 배로 군량과 군기를 운반하느라 종일 부산하였다. 니에시청도 군대를 거느리고 백석포에 내려 아산읍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예지차오의 병함 1척이 내도의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니에시청의 경우와는 달리 배와 말의 준비 문제로 상륙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수가 밀려올 때 예지차오의 대군은 배를 타고 백석포로 향했다.

이중하는 초토사가 ‘비류(匪類)’를 크게 이겨 도망가고 흩어졌다는 충청감사의 전보 내용을 예지차오에게 설명하고 ‘적도(賊徒)’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진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예지차오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니에시청은 내일, 자신은 모레 행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며칠 만이라도 쉬면서 피곤함을 풀고 잠시 정탐한 사실을 기다린 후 행군할지 머물지를 결정하자고 완곡히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공주에 도착하여 친히 적들의 형세를 살펴본 연후에 행군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면서 일축하였다. 이중하는 ‘읍촌에서 짐을 질 백성들은 뽑아 군에서 필요한 땔감과 말먹이 등 각종 물건의 짐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값으로 쳐서 지급할 것이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걸었다.

  한편 예지차오도 별도로 전주의 농민군들이 흩어져 달아났다는 정탐 내용을 확인하였지만,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지시를 받은 후 수군과 육군의 거취를 정하겠다고 우리 측에 회답하였다. 전주의 동학농민군들이 철수했다는 조선 정부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적당(賊黨)은 그래도 몇몇 군데에 둔을 치고 모여 있다’는 전보를 받은 청국군 진영에서는 관원을 전주에 파견하여 상세히 탐지토록 하였다. 예지차오는 ‘여비(餘匪)가 아직도 많이 몰려 있다’는 전주 파견원의 정탐 보고에 따라 군사를 보내 그들의 근거지로 들어가서 ‘비도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중하는 ‘이미 흩어진 여비들은 저들 스스로 귀화할 것인즉, 이와 같이 사람을 파송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고 전하였다. 이중하의 건의에 따라 청국군은 당분간 아산 일대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지차오는 농민군 진압을 위한 출동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비당(匪黨)이 아직도 장성ㆍ고부 등지에 남아있고 다시 방자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진군시켜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지금 초토사를 철수시켰고, 남은 ‘비도’들도 이미 흩어졌으니, 근심할 것이 못 된다면서 정탐한 내용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다시 정확하게 탐지한 후에 병사들을 진군시키자는 신중론을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이미 북양대신으로부터 속히 ‘남비(南匪)’를 쓸어버릴 일에 대하여 전보로 영을 받은 것이 지엄하므로 감히 잠시도 늦출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그 결과 니에시청으로 하여금 소속 병용 900명과 진마(陣馬) 100필을 거느리고, 각 영과 각 역에는 말 150필의 대기를 지시하고 전주를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기간 일본군의 인천 출병과 서울 도성 밖 진입상태에서 청국군 주력은 전라도 행을 중지하고 다시 아산으로 되돌아오면서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예상되는 일본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니에시청은 6월 13일 아산을 출발하여 성환역을 지나 다음날 진위와 수원 등지를 정찰하고 15일에는 평택을 거쳐 아산으로 되돌아왔다. 23일 새벽 니에시청은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 즉, 성환 전투의 준비를 위해 성환으로 부대를 옮겼다. 당시 황현(黃玹)의 기록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서울로부터 삼남 가는 도로변의 성환 100여 개 마을이 청국군에 유린되었고 노인과 어린이의 사망자가 이어졌다고 한다. 󰡔남정일기󰡕는 6월 27일 성환전투까지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서이다.

〈갑오실기(甲午實記)〉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중요 사실을 정부 입장에서 날짜별로 기록한 것으로 필자는 확인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3월 26일 자 의정부 초기부터 시작한다. 최근에 호서ㆍ호남ㆍ영남 등지에서 협잡의 부류들이 무리를 모아 멋대로 못된 풍습을 자행하고 난동을 부린다고 하니 3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만약 고치지 않고 예전과 같은 폐단이 있다면 그 괴수를 잡아서 효수해 경계하고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그 결과 29일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전라 병사에 제수하고 현지에 파견토록 하였다.

4월의 기사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호남지역 파견, 고부민란과 군수 조병갑의 도주, 안핵사 이용태의 파견과 불법 행위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후는 고부ㆍ금구 농민군의 활동과 전주 점령 내용까지 이어진다. 5월 1일에는 청국 원병의 조선 파견 요청에 관한 조정 내의 논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임 대신 입궐 시 고종은 청국군의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면서, “총리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 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자 고종은 일본이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궁궐에서 물러난 뒤 이 일로 민영준이 영돈령부사 김병시에게 편지와 사람까지 보내어 문의하자 “비도(匪徒)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라면서 잠시 관망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민영준이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고종은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기운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내 이 내용을 전달하니, 위안스카이는 곧장 톈진으로 전보하여 며칠 되지 않아 청병 군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예지차오가 2천여 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6월의 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관련 내용이다. 󰡔갑오실기󰡕에 따르면, 6월 21일 “새벽에 일본 병사 몇천 명이 와서 경복궁을 지키고 영추문 밖에 이르렀는데, 자물쇠가 열리지 않자 나무 사다리를 타고 궁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또 동소문은 불을 질러 돌진하여 자물쇠를 부수어 문을 열고, 임금이 계시는 집경당(緝敬堂)의 섬돌 아래로 곧장 들어와 빙 둘러 호위하고 각각의 문을 지켜서고 조정 관리와 액속(掖屬)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양 병정 중에 신남영(新南營)에 있던 자는 곧장 건춘문으로 들어와서 일본 병정을 향해 발포하였다. 안경수는 안에서 나와 서둘러 중지시켰다. 평양 병사는 분한 마음으로 군복을 벗고 나와서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면 최초의 교전은 사다리를 타고 궁을 넘은 일본군과 수비병 간에 궁 안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이미 궁 안에 있던 안경수가 일본군과 내응하여 전투 확산을 저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부터 8월까지의 기록은 군국기무처 설치와 이 기구에서 입안 시행한 각종 개혁안과 정부의 직제 개편 내용 등에 관한 것이다. 원훈(元勳)이자 전 총리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조선에 공사로 파견하였는데, 총리대신에게 전임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핍박한 것은 매우 불경한 것이었고 지금까지의 의안 대부분은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행한 것 뿐으로 매우 한심스럽기에 대개 ‘개화에 관한 법’은 하루 이틀에 급하게 논의할 수 없고 점차 실시하고 서서히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10월의 기사는 성주와 하동의 소요로 인한 민가 소실, 수원 및 용인 동학농민군 지도자 효수 및 수색 체포 처단, 법부 협판 김학우 암살 등의 내용이다.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ㆍ경상도에 위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래게 한 내용도 상세하다.  

11월에는 정부군과 일본군의 호남 농민군에 대한 연합 토벌 작전과 지역별 농민군 체포 차단 상황, 공주 효포전투에 관한 선봉장 이규태의 보고, 회덕전투에 관한 교도 영관 이진호 보고, 직산과 목천ㆍ공주ㆍ노성ㆍ논산 농민군 체포 처단에 관한 선봉장 보고 등을 기록하였다. 12월에는 패잔 농민군 체포 처형, 금구 원평 농민군의 동향, 홍산ㆍ서천 농민군 토벌과 함께 김개남 처단, 전봉준 체포 압송 소식을 기술하고 있다. 󰡔갑오실기󰡕에는 청일전쟁과 청국군의 동향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지차오는 부하 병사 다수를 이끌고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했고 흩어졌던 청국군은 평양에서 합류했다. 원래 청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올 때 의주부터 평양에 이르는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도시락밥과 국을 싸들고 와서 맞이하였고 쌀과 소고기 등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히 웨이루쿠이(衛汝貴)의 성자군(盛字軍)은 오합지졸로 통솔이 되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는 곳은 노략질로 넘쳐나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시기 평양 이북부터 의주까지의 지역 사정을 ‘십실구공(十室九空)’의 형세로 비유하고 있다. 당시 평양은 인구 2만여 명의 도시로 1만 5천여 명인 청국군의 군량과 군수 등을 대기는 쉽지 않았고 질고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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