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12월 5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레오니트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모였다. 우크라이나가 구소련 체제에서 보유했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러시아·영국이 경제 지원은 물론 안전과 주권을 보장한다는 문서에 서명하기 위해서다. 우크라이나는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고 경제 지원 등을 받는 대가로 1800여 개의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핵무기 발사 통제권은 러시아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당시 온전한 핵무기 보유국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가 안전 보장을 전제로 러시아에 핵무기를 넘겨준 이유이기도 하다.
네 정상이 서명한 문서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라 불린다. ‘양해각서’인 메모랜덤은 법적 구속력이 강한 조약이나 협정과 달리 실효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약속이다. 의회 비준이 필요 없고, 약속 불이행 시 특별한 강제력도 없다. 실제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 병합과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사실상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탈했을 때 미국과 영국은 “심각한 각서 위반”이라고 비난했지만 군사적 대응은 없었다. 당시 클린턴 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핵을 가지고 있었다면 러시아의 침공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만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전 회담이 부다페스트에서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중립국보다는 러시아에 호의적인 헝가리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안전 보장 약속을 믿었다가 배신당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의 쓰라린 악몽이 있는 우크라이나에는 탐탁지 않은 곳이다. 어떤 나라라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군사력과 탄탄한 동맹 외교 없이 주변 강대국의 약속만 믿는다면 상시적으로 주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