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옹호’ 장군 이름 딴 포트 브래그, 베닝
바이든 행정부 시절 포트 리버티, 무어로 개칭
트럼프 취임 후 원상 복구… “다른 사람 기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미국 국방부가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이름이 바뀐 육군 기지들의 원상 복구에 나섰다. 명분은 ‘유서 깊은 기지명을 계속 유지해 전통을 지키자’는 것이나, 실은 바이든이 미군에 남긴 흔적을 깨끗이 지우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수단이 동원돼 눈길을 끈다.
8일(현지시간) 미 국방부에 따르면 트럼프 취임 후 미국 본토에서 가장 큰 육군 기지 2곳이 개칭됐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명령에 따라 시행된 이 조치는 노스캐롤라이나주(州)에 있는 ‘포트 리버티(Liberty)’를 ‘포트 브래그(Bragg)’, 조지아주에 있는 ‘포트 무어(Moore)’를 ‘포트 베닝(Benning)’으로 각각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핵심은 바이든 행정부 당시 새롭게 부여된 이름을 내던지고 옛 명칭으로 되돌아갔다는 점이다.

포트 브래그는 미 육군을 대표하는 공수 부대의 주둔지다. 기지 이름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지휘관으로 활약한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에서 따왔다. 포트 베닝은 미 육군의 보병학교와 기갑학교 등 교육·훈련 시설이 밀집한 곳이다. 역시 남북전쟁 당시 남군 지휘관으로 복무했던 헨리 베닝 장군의 이름을 따 기지명을 지었다.
문제는 브래그와 베닝 둘 다 노예제를 지지한 인종 차별주의자였다는 점이다. 2020년 5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당시 46세)가 절도범의 누명을 쓰고 경찰에 체포된 뒤 백인 경찰관의 가혹 행위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미국에선 흑인 인권 옹호와 인종 차별 철폐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며 수도 워싱턴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당시 집회 참가자들이 외친 가장 대표적인 구호였다.

2020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이긴 바이든은 이듬해 취임 후 행정부에 인종 차별의 잔재를 청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미 국방부는 흑인 노예제를 지지했던 남군 장군 이름을 따 지은 포트 브래그와 포트 베닝을 각각 포트 리버티, 포트 무어로 교체했다. 새 명칭 리버티는 말 그대로 ‘자유’라는 뜻이고, 무어는 과거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할 무어 장군의 이름을 차용했다.
이번에 미 국방부는 포트 리버티와 포트 무어를 각각 포트 브래그, 포트 베닝으로 원상 복구하며 ‘과거 회귀’에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국방부에 따르면 브래그는 남군 장군 브래그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롤랜드 브래그 육군 일병(1999년 별세)이다. 베닝 역시 남군 장군 베닝이 아니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프레드 베닝 육군 상병(1974년 별세)이라는 것이 국방부의 설명이다. 브래그 일병은 2차대전 도중 가장 치열했던 벌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은성훈장(Silver Star)을 받았다. 베닝 상병 또한 1차대전 당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이 수여됐다고 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붙인 새 명칭은 마음에 안 들고, 그렇다고 노예제를 지지한 장군들 이름을 다시 붙일 수는 없는 딜레마 속에서 ‘동명이인’ 영웅을 발굴해 소환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된 셈이다. 이에 대해 미 국방부는 “비록 기지 이름은 원상 복구됐지만 전과 전혀 다른 별도의 개인을 기린다”고 설명했다. 미군에 남아 있는 바이든 시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속이 뻔히 보이는 편법을 썼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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