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토한 고종, 통곡한 총리, 폭발한 민심…‘을씨년스러웠던’ 1905년 을사년

2025-02-10

‘을씨년스럽다’는 ‘2025년 을사년’을 맞아 더욱 인구에 회자되는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말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을사년’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처럼 떠돌고 있다.

■을사년, 을씨년

하지만 1855년 편찬된 조재삼(1806~1866)의 <송남잡지>에 다른 설명이 등장한다.

“을사년=세간에 을사년을 흉하게 여겨 무서워하기 때문에 살아갈 낙이 없는 지금의 삶을 두고 이렇게들 말한다.”

1897년 캐나다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1863~1937)이 편찬한 <한영자전>에도 나온다.

“…‘을사=기근의 해(1785년)’를 가리키는데, 지금은 가난과 고통 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쓰인다.”

자전이 콕 찝은 ‘1785년 을사년’이 주목된다. “1785년 11월21일 “올해까지 거듭된 흉년으로 떠도는 유랑민이 다시 모여 정착할 가망성은 없다”(<일성록>)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절망적인 ‘늑약’까지 ‘1905년 을사년’에 맺었으니 어찌되었겠는가.

‘을사년’에 요즘 식으로 ‘~스럽다’는 수식어를 붙인 이가 소설가 이해조(1869~1927)다. 즉 1908년 발표한 소설 <빈상설>에서 “만장 같은 저(주인공)의 집은 을사년시러워 꿈에도 가기 싫다~”고 표현했다. 이해조의 ‘을사년스럽다’는 기존의 ‘을사년’ 이미지에 1905년을 기억한 당대 민중의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형용사였을 것이다.

■이토의 안하무인

이제 ‘1905년 을사년’ 11월로 돌아가 보자.

청일전쟁(1894년 7~1895년 4월)에 이어 러·일 전쟁(1904년 2~1905년 9월)에서도 승리한 일본에게 더이상의 적수는 없었다.

일본은 미국과는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으로,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8월)으로, 러시아와는 포츠머스 조약(9월)으로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차례로 인정받았다. 일본은 일단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10월27일 일본은 각료회의에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수중에 넣는 시기는 11월 초로 한다’는 8개항의 대책을 마련한다.

그 중에는 군대를 동원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끝내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지 못할 때는 ‘일방적으로 조약 체결을 선언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는 일본의 사주 아래 ‘한국의 보호국화’를 강변하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11월9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가 특사 자격으로 일왕의 칙서와 조약문 초안을 갖고 입국했다.

15일 고종을 알현한 이토는 안하무인이었다. 예컨대 “한국이 누구 덕분에 독립을 유지하며 살아갔느냐…이제 동양의 평화를 위하려면 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신 행하는 것만 유일한 방책이니 즉시 동의해주기 바란다”고 겁박했다. 이토는 이날 4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내용을 제멋대로 정리했다.

“한국 황제는…이번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同意セラルルノ止ムヲ得ザル所以), 그리고 이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의 장래에 맞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본사(本使·이토)에게 ‘당국자에게 명하여 일본 정부의 제안에 기초하여 타협을 이루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조작으로 드러났다.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소장된 보고서의 초안(1905년 12월8일 작성)에는 ‘(한국 황제는 이번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同意セラルルニアラザレバ)라 한 부분을 지워버리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同意セラルルノ止ムヲ得ザル所以)~’으로 둔갑시킨 흔적이 남아있다.(강성은 도쿄 조선대 교수)

■고종의 시간끌기

그럼 고종과 이토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자.

“형식은 존속하고(한국이 파견하는 공사제도는 그대로 두자는 의미인 듯) 내용은 협상으로 정하면 이의 없다.”(고종)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면 한국의 지위는 더 큰 불이익을 받을 것….”(이토)

“중대사는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정부 신료의 의견을 구하고 민심도 살펴야 한다.”(고종)

“한국은 군주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군주전제 국가가 아닌가요…폐하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하려는 것…”(이토)

“아니다. 우리에겐 의정부 뿐 아니라 중대사와 관련, 의견을 묻는 중추원 제도도 있다.”(고종)

“오늘 밤 외부대신을 불러 일본의 제안에 따라 바로 협의를 결말짓고 조인하라는 칙명을 내리시길….”(이토)

“어쨌든 외부대신에게 ‘타협에 힘쓰도록 하라’는 뜻을 전달하겠다.”(고종)

대화내용을 뜯어보면 고종이 일본의 의도에 따라 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운명의 17일 밤 8시

그러나 사실상 조약을 성사시킨 것으로 추단한 이토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16일과 17일 오후 사이 이토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1860~1939) 등이 번갈아가며 참정대신 한규설 등 8대신을 괴롭혔다. 그때만 해도 8대신은 ‘절대 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 17일 밤 8시 이토가 한국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일본군과 헌병대는 8대신이 모여있는 수옥헌(중명전) 주변을 둘러쌓았다.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이토는 고종에게 여러번 접견을 청했다. 고종은 “몸이 아프니 대신들과 협상하라”고 했다.(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 이를 두고 “고종이 일본 특사(이토) 에게 이런 말을 했을 지 의문”이라면서 일본측의 조작된 전언일 가능성을 개진하는 연구자(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있다.

아무튼 밤 8시 열린 회의는 이토가 대신들을 한 명 씩 지목하며 ‘찬반’를 묻고 ‘찬반’ 여부를 자의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조폭’이나 다름없었다. 먼저 이토가 한규설(1848~1930)의 의견을 물었다. 한규설은 “한결같이 반대한다(一直反對)”고 딱 잘랐다.

이토가 “외부대신(박제순·1858~1916)은 어떠냐”고 물었다. 박제순은 “외교권이 넘어가는데 외부대신으로서 어찌 찬성하겠냐”면서도 “그러나 황제의 명이면 별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이토는 “이미 협상으로 잘 처리하라는게 폐하의 명령이니 외부대신의 의견은 찬성이라 해석해도 좋겠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박제순은 침묵했다.

탁지부대신 민영기(1858~1927)는 ‘반대’의 의견을 냈다. 법부대신 이하영(1858~1929)은 “세계 대세와 동양 형편상 불가피하지만 이미 ‘한일의정서 및 협정서’(1904)가 체결된 마당에 굳이 다시 새로운 협약을 맺을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토는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법부대신의 의견은 ‘동의’로 봐도 지장이 없다”고 해석했다.

■“찬성이라 치자.”

이때까지 반대 2표, 억지 찬성 2표였다. 그런데 학부대신 이완용(1858~1926)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완용은 “우리 외교는 종잡을 수 없이 바뀌었고…그 결과 일본이 두차례 전쟁을 치러…겨우 한국의 지위를 보전한 것…일본의 새로운 협약 제출은…우리나라 스스로 초래했다”고 자아비판했다. 그러면서 “약소국인 한국이 거부할 힘이 없으니…협약 초안의 자구 등을 다소 수정해서 원만한 타협을 보자”고 발언 했다. 이토는 반색했다. “자구를 고치면 되니 귀하(이완용)의 의견은 ‘전적으로 동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과 내부대신 이지용(1870~1928),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1934)은 “학부대신(이완용)의 의견에 따른다”고 줄줄이 ‘가(可)’표를 던졌다.

이토는 “‘확실한 반대’는 참정대신(한규설)과 탁지부대신(민영기) 등 2명 뿐”이라고 선언했다. ‘찬성 6 반대 2’라는 것이다.

■탈취된 외무장관의 도장

이후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한 대신들은 이른바 협약안의 자구 수정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결국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라는 허울좋은 전제조건을 넣고,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5조)’는 조항을 추가하는 선에서 조약문이 확정된다. 일본측은 참정 대신(국무총리)의 관인은 필요없으며, 외부대신의 인장(관인)만 찍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일본공사 하야시가 본국 가쓰라 타로(桂太郞)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와, 대한매일신보 등의 보도가 완전히 다르다. 일본측 정보는 다음과 같다. 즉 외부대신의 관인은 외부(외무부) 사무실에 있었다. 이에 외부대신(박제순)이 여러차례 외부에 전화를 걸었지만 인장보관자인 비서과장이 자리에 없었다. 결국 관인은 2시간여 후 보관자가 궁중에 가져와서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11월25일)의 취재 결과는 달랐다. 신문은 “조약의 조인이 어렵다고 여긴 일본측이 일본공사관 통역인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과 공사관 서기관인 누마노(沼野) 등을 외부(외무부) 사무실에 보내 외부대신 인장을 탈취했다”고 전했다.

“이때 일본군이 외부 건물을 에워쌓았다. 그렇게 탈취한 도장을 수옥헌(중명전) 앞에서 기다리던 고쿠분쇼 타로(國分象太郞)에게 건냈고, 그 도장을 찍은 것….”

대한매일신보의 기사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러니 이 기사에 신뢰감을 보낼 수밖에 없다.

■흠결 투성이 조약문

어쨌든 기나긴 줄다리기가 끝난 때는 날을 넘긴 1905년 11월18일 오전 1~2시 쯤이었다.

을사늑약의 골자는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고(1·2조), 그것을 관장하는 통감을 두는 것(3조)’ 등이었다.

그러나 이 늑약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여럿 보인다. 조약 체결에 필요한 서명자인 외부대신(박제순)의 전권위임장이 존재하지도, 또 그것을 일본측과 교환하지도 않았다. 조약문을 보면 일본측 대표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앞에는 특명전권공사라 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측 대표라는 박제순의 앞에는 그냥 외부대신이라고만 적혀있다. 일본과 달리 고종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조약을 맺으라고 공식 허락하는’ 전권대사 임명장을 주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 뿐이 아니다.

조약문에는 고종(황제)의 어새도 찍히지 않았고, 조인문서에 조약의 명칭도 없다. 국가간 조약 체결은 위임·조인·비준 등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 어떤 것도 갖춰지지 않았다. 즉 을사늑약은 강박에 의해 맺어진 ‘무효 조약’일 뿐 아니라 아예 조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고종의 교묘한 시간끌기와 한규설 참정대신 등의 끈질긴 반대 덕분이라는 견해가 주목을 끈다.(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를 근거로 고종은 “을사조약은 한국 황제가 동의하지도, 서명하지도 않은 늑약”이라고 호소하는 밀서와 친서를 잇달아 보냈다.

■‘미랭시’를 자처한 한규설

이 대목에서 8대신의 행보가 두고두고 도마 위에 오른다.

참정 한규설은 이완용 등의 배신으로 을사늑약이 선포될 위기에 빠지자 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고종을 알현하여 “자칫 통과될 지 모르니 만민공론에 붙이자고 일단 연기하자”고 아뢸 작정이었다.

그러나 알현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일본대사관 통역이 한규설의 옷자락을 붙잡고 궁궐의 곁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곧이어 현장에 배치된 일본 헌병들이 문을 걸어잠궜다. 잠시후 이토가 찾아와 설득을 곁들이며 한규설을 겁박했다.

그러나 한규설은 “나는 이제 순국하기로 결심했다”고 정색했다. 이토는 “황제가 칙령을 내리면 어쩔거냐”고 물었다.

한규설은 “사직은 무겁고, 임금이 가벼우니 비록 칙령이 내려졌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의 언행은 이후에도 일직(一直), 즉 한결 같았다.

그는 1930년 1월1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미랭시(未冷屍·식지않은 송장)’로 표현했다.

“나는 ‘미랭시’요. 산송장이나 다름 없소. 을사년 이후 말도, 듣지도 않으려 했더니….”

그해 11월8일 타계한 한규설은 “나는 죄인이니 부고를 내지도 말고, 장례도 간단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완용=을사늑약의 우두머리

한규설을 뺀 7대신은 어땠을까. 1905년 12월16일 ‘을사5적’을 지목된 대신들이 “억울하다”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완용·박제순·이지용·권중현·이근택 등은 “8명 가운데 대뜸 우리 5인만 지목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니 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8명 가운데 조약체결에 앞장선 이완용은 대한매일신보(12월1일)의 표현대로 ‘(을사늑약의) 원흉(首禍)’으로 꼽혔다. 또 이완용의 주장에 동조한 이지용·이근택·권중현과, 조약서에 이름과 관인을 남긴 박제순 역시 매국노로 당연히 지칭될 수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토는 분명 대신 8명 중 한규설(참정대신)·민영기(탁지부대신)을 뺀 6명이 찬성표를 던졌다고 했다.

6명 중에는 거론한 5적 외에 법부대신 이하영이 포함되어 있다. 이하영은 “굳이 새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대했지만 이토에 의해 ‘찬성표’로 강제 분류된 바 있다. 그 덕에 ‘을사5적’의 명단에서 이하영이 빠졌을까.

■을사 오적? 을사 6적?

‘조약 체결의 전말’을 최초로 전한 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자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신문은 17일 밤 회의에서 “참정 한규설과 법부(이하영)·탁지부(민영기) 등 두 대신은 ‘부(否·반대)’자를 쓰고 다른 사람은 모두 ‘가(可·찬성)’자를 썼다”고 전했다. 이하영의 경우 이 황성신문의 최초 보도 때문에 ‘을사5적’이라는 역사의 손가락질은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범석(1863~?)의 ‘경난록’(<확재집>)은 “…법부대신 이하영이 조약에 날인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일본을 돕고는 겉으로 한국을 위하는 척했다”고 비판했다.

하기야 그 날짜(11월20일) 황성신문의 말미에 “‘참정대신의 도장은 없지만 다른 모든 대신들이 날인하면 된다’고 했고 그에따라 다른 대신들이 일제히 날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이하영은 이완용의 제안에 따라 조약문의 자구를 수정하는 자리에서 적극 가담했다.

한일합병 후 귀족 작위(자작)을 받고 총독부 중추원에서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렇다면 한규설과 함께 ‘반대파’ 2인에 속한 민영기는 어떠한가.

그러나 그 역시 즉시 조약의 자구 수정에 참여했고, 한일합병 후 귀족(남작)이 되었으며 역사 중추원 고문으로 출세했다. 따지고보면 이하영까지 포함하면 ‘을사6적’이요, 민영기까지 굳이 넣는다면 ‘을사7적’으로 일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황성신문 기사 ‘덕분’일까. ‘을사×적’이니 하는 천고에 지워지지 않을 희대의 악평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외부대신 박제순의 ‘갈 지(之)자’ 행보

오욕의 조약문에 ‘이름과 도장’을 남긴 박제순의 행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외부대신 박제순은 ‘죽어도 불가’의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한규설과 함께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군신(임금과 신하)가 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거절해야 한다”고 굳게 결의했다. 한규설은 훗날 박제순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일본측이 외부대신의 도장을 훔칠 지 모른다고 걱정했더니…박제순은 ‘도장을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테니 외부(외무부) 대청 뒤에 있는 연못 속에 넣어두는 게 제일 안전할 것 같다’고 했다.”(동아일보 1930년 1월1일)

18일 새벽 1~2시 사이 상황이 끝나 이토와 하야시가 회의장을 떠난 뒤 한규설 참정이 풀려났다.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었다는 말에 난(한규설) 제정신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그때 믿었던 박제순이 무안한 얼굴로 나왔다. 내가 ‘이 사람 연못에 집어넣는다는 도장을 어찌했느냐’고 호통쳤지만 쓸 데 없었다. 박제순도 통곡했다.”(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

■피를 토한 고종

11월18일 새벽 이후 서울은 살풍경 그 자체였다. <매천야록> 등에는 ‘을씨년스러운 을사년 11~12월’이 묘사되어 있다.

“사기가 저하된 도성 사람들은 수천 명 수백 명이 떼를 지어 큰 소리로 ‘나라가 망했으니 어떻게 살란 말이냐’고 외쳤다. 그들은 미친 듯이 슬퍼하며 꾸짖고 서성거리며…밥짓는 연기도 나지 않아…일본인 병사들이 순찰을 돌며 비상상태에 대비…”

<매천야록>은 “이런 광경이 한달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전했다.

<대한매일신보> 11월27일자는 늑약 체결의 전말과 함께 ‘체결 후의 국내 동향’을 전했다.

“18일 아침부터 30명 씩의 일본군이 각 대신의 집을 에워쌓으며 도성 내에 조약 체결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백성들이 분기탱천…그런데 이 조약은 참정대신의 도장이 없고…일본의 위협에 못이겨 조인되어…황제가 강경한 반대로 재가를 하지 않았으니….”

17일 밤 이토와 대한제국의 7대신이 조약문 수정에 나설 무렵, ‘한인 40여 명이 몰려가’ 비어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저질렀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고종이 “눈물을 흘리고 피를 토하면서 ‘대신들이 일본과 한 통속이 되어 나를 협박하여 조약에 조인한 것이니 짐의 백성은 궐기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정보가 일본공사에 보고되었다.(18일)

황성신문은 11월20일자에 조약체결의 전말을 전하면서 주필겸 발행인인 장지연(1864~1921)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놓아 우노라)’을 게재했다. 장지연은 “개 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이…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됐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대한매일신보는 27일자 영문판(Korea Daily News)에 황성신문의 ‘을사늑약 전말 기사(20일자)’와 함께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도 영문으로 번역하여 실었다.

■줄 잇는 자결순국

11월30일 시종무관장(경호실장) 민영환(1861~1905)이 자결순국했다. 민영환은 고종에게 올릴 상소문과 각국 공사 및 2000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겼다.

이날 일본측이 주고받은 정보보고가 숨막힌다.

“아침부터 종로거리에 다수의 한인이 집결하여 교통이 두절…(일본) 경찰과 헌병이 제지했더니 군중이 돌을 던져 저항하면서 격투가 벌어져…다수의 부상자가 생겨…헌병주둔소가 파괴되자 경찰이 발포까지…군중 100여명 체포.”(경찰보고)

민영환 자결 순국 이후 민심이 폭발했고, 급기야 (일본) 경찰이 발포까지 했다는 것이다.

원로 조병세(1827~1905)는 79살의 노구를 이끌고 소두(疏頭·상소의 대표)가 되어 조약의 철회와 을사오적의 처벌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서울 시내 중심 상가가 모두 철시됐다.

“조병세가 입궐하면서 백관을 소집했다. 그러자 종로와 남대문 일대의 모든 상점이 폐점·철시…국가 원로가 국가 대사와 관련하여 입궐 상소할 때는 시내의 모든 상점이 휴업하면서 근신하는게 풍습….”(11월28일·일본 정보보고)

그러나 조병세의 상소는 무위로 끝났다. 그때 민영환의 순국소식을 들은 조병세는 “내가 죽지 않으면, 죽는 날 어찌 문약(文若·민영환의 자)을 대하겠느냐’면서 순국했다”(<매천야록>)고 한다. 이어 을사년 12월 한달동안 홍만식(1842~1905)·송병선(1836~1905)·이명재(1838~1905)·이상철(1876~1905)·김봉학(1871~1905)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을사의병의 봉기도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그중 민종식(1861~1917)·안병찬(1879~1929)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은 한때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했다. 전 참찬 최익현(1833~1907)은 73살의 나이로 전북 태인에서 궐기했다. 영남에서는 신돌석(1878~1908·경북 평해·영해)과 정환식(1843~1907)·정용기(1862~1907) 부자(영천) 등이 활약했다.

■2025년판 을사×적은?

어떠한가. ‘1905년 을사년’은 역사상 가장 ‘을씨년스러운 을사년’이었다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120년이 지난 ‘2025년 을사년’은 어떠한가. 물론 나라가 석양으로 곤두박질 친 ‘1905년 을사년’과는 비교할 수 없겠다. 그러나 ‘2025년 을사년’ 또한 만만치 않게 ‘을씨년스럽지’ 않은가.

120년 전 을사늑약 당시 수옥헌(중명전)에 모인 8대신의 면면을 곱씹어보자.

만고의 매국노로 낙인찍힌 ‘을사오적’과, 용케 그 오명은 벗었지만 결국 친일파의 길을 걸은 ‘2인’이 있었다.

한규설은 당시 내각을 이끈 참정대신으로 하마터면 ‘늑약’의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은 일본의 집요한 협박 속에서도 ‘절대 안된다’는 일관된 입장을 표명했다. 게다가 이후에도 ‘죄인’이자 ‘산송장’을 자처하면서 은둔했다.

그로써 한규설은 ‘을사늑약의 수괴’가 아닌 ‘절개를 지킨 애국지사’로 거듭났다.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다.

지금 계엄령 이후 눈 앞의 표를 위해 역사의 심판을 경시하는 자들이 넘쳐난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거지 하나하나가 빼곡히 기록되고 있다. 그들 중 누가 ‘2025년판 을사×적’으로 손가락질 받을 건가. 을사 100적, 을사 1000적이 나올까 두렵다.

참고로 최익현이 올린 을사늑약 직후 올린 상소문을 소개한다.

“난신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번에 도장을 찍은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오적의 목을 베어 매국한 죄를 바로잡고…. 명만 내리시면 역적들의 시체를 길거리에서 불태울 것입니다.”(<면암선생문집>)

(이 기사의 내용 중 ‘조약의 강제 부분’과 관련해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참고자료>

이태진,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조약 강제와 저항의 역사>, 지식산업사, 2016

이태진, ‘1995년 보호조약에 대한 고종황제의 협상지시설 비판’, <역사학보> 185집, 역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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