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기반 기술…바이오 혹한기 뚫고 7500억 기술 수출

2025-12-11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95〉 이정호 소바젠 대표

코로나19 종식과 맞물려 바이오산업은 혹한기를 맞았다. 투자 심리 위축으로 자금 조달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시장 분위기를 뒤바꾸는 소식이 최근 나왔다. 난치성 뇌질환 신약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소바젠이 지난 10월 이탈리아 제약사 안젤리니 파마와 7500억원(약 5억5000만 달러) 규모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것. 난치성 뇌전증(반복적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 치료를 위해 개발한 후보물질인데, 사람 대상 임상시험도 거치지 않은 비임상 단계에서 계약이 성사됐다. 국내 바이오벤처에서 보기 드문 연구 기술 수출이자, 회사 창업 7년 만에 거둔 성과다.

난치성 뇌전증 치료 후보물질

이탈리아에 임상 전 이전 계약

질환 원인 최초로 규명한 연구

신약 개발 전문가 영입해 결실

지난 3일 대전 KAIST 문지캠퍼스에서 만난 소바젠 창업자이자 CSO(최고과학책임자) 이정호(48) 대표는 “자금이 거의 말라가고 ‘이러다 회사가 망하는 것 아닐까’ 싶던 시점에 딜(계약)이 성사됐다”며 “영장류 실험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이례적으로 작지 않은 규모의 기술이전이 가능했던 것은 기반이 되는 사이언스(과학 연구)가 탄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의사 면허를 갖고 있으면서도 진료실이 아닌 실험실에서 연구를 이어온 의사과학자다. 2012년부터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다 2018년 소바젠을 창업해 대표를 맡고 있다.

창업에 뛰어든 의사과학자

의사가 아닌 과학자를 택한 이유는.

“집안에 의사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 말씀에 의대를 갔지만, 질병의 근원을 파헤치는 기초의학과 뇌 연구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의대 동기 190명 모두 똑똑하고 환자도 잘 볼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마침 의사 전문연구요원(의사 면허증 소지자의 연구기관 병역 의무 대체) 제도 덕분에 연구 흐름 끊길 걱정 없이 연대 의대에서 신경약리학 석·박사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미국 UC샌디에고 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며 연구자의 길로 마음을 굳혔다.”

창업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돌아와 2012년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연구에 최적화된 학내 환경 덕에 2015년 의학 분야 최고 권위 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논문을 싣는 성과를 냈다. 대뇌 피질에 국소적으로 기형이 생기는 난치성 질환인 국소 피질 이형성증이 특정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 즉 질환의 원인을 최초로 규명한 연구였다. 논문 발표 후 글로벌 제약사로부터 연락이 와 기초 연구를 신약으로 개발해 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에 직접 신약 개발을 하는 회사를 차리게 됐다. 연구 성과가 실제 환자 치료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2018년 창업, 숱한 시행착오

교수로서 창업에 어려움은 없었나.

“KAIST는 교원 창업을 굉장히 장려한다. 창업 교수는 필요하면 1년(2학기)에 한 학기만 수업해도 되는 정책도 있다. 문제는 신약 개발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창업했다는 점이었다. 신약 개발은 규제와 절차가 매우 복잡한데 그간 기초 연구만 했던 터라 그 사실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경영 전문가인 김병태 현 이사회 의장이 비즈니스(경영)를 맡고, 내가 연구 부문을 맡는 방식으로 2018년 5월 출발했다. 신약 개발 회사인데, 정작 개발 파트가 빠져 있었던 거다.”

개발 부문이 빠진 구조는 어떤 한계가 있었나.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일례로 쥐에 후보물질을 투여한 뒤 규정상 필요한 기간 동안 관찰했고, 별다른 이상이 없어서 영장류 실험 단계로 넘어갔다. 영장류에서도 겉으론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부검을 해보니 소뇌의 신경세포가 죽어 있고 독성 물질이 검출됐다. 알고 보니 실제 개발사들은 규정보다 기간을 더 늘려 반복적으로 점검하는 경험적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그 과정을 거쳤다면 쥐 단계에서 독성을 잡아내, 비용이 많이 드는 영장류 실험까지 갈 필요도 없었던 거다.”

이 대표는 당시 상황을 “축구로 따지면 체력과 기본기는 탄탄한데 전술이 없어 헛발질하는 꼴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론상 연구와 실제 신약 개발은 전혀 다른 세계”라면서다.

어떻게 보완했나.

“창업 후 약 5년 동안은 개발과 관련해 효과·부작용을 검증하는 고유의 노하우와 시스템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2023년에는 외부에서 개발 부문 대표를 영입해 조직을 개발·경영과 연구 부문의 투톱 체제로 재편했다. 개발 부문에 박철원 대표가 합류한 뒤에는 의사결정 구조가 한층 정리됐다. 경영과 연구 중심으로 이뤄지던 기존 의사결정에서 개발에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실질적인 개발 단계에 맞춘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었다. 서울대 약대 출신인 박 대표는 LG에서 신약 개발과 글로벌 기술이전 경험을 쌓은 인물이다.”

다양한 난치성 질환 개발로 확장 계획

안젤리니 파마와의 기술이전 계약은 어떤 의미인가.

“소바젠이 연구로 돌파구를 찾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미가 큰 이유는 기술이전한 물질이 사람 임상을 거치지 않은 비임상 초기 단계라는 점이다. 이 단계의 약물이 대규모 기술이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자금이 뒷받침됐다면 임상까지 진행해 더 큰 규모 계약을 기대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회사가 먼저 살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비임상 단계에서 거래를 성사시킨 것은 회사를 살리는 결정이자 우리가 가진 연구와 데이터를 시장에서 검증받는 계기가 됐다.”

기술이전 이후 양측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하게 되나.

“이번 계약은 비임상 단계에서 물질에 대한 권리를 통째로 이전하는 구조다. 향후 영장류 실험은 우리도 참여하지만 비용은 안젤리니 파마가 부담하며, 임상 역시 그쪽이 주도한다. 상업화 권리는 안젤리니 파마가 가지게 되고, 소바젠은 향후 개발 단계에 따라 마일스톤·로열티를 받는 형태다.”

소바젠의 다음 챕터는 무엇인가.

“지난 몇 년간 경험한 것은 치료법이 없던 질환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환자들이 활용 가능한 약으로 개발하는 노하우와 시스템을 갖추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뇌 질환에 집중하고 있지만 모자이시즘(일부 세포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현상) 기반 질환은 간·위 등 여러 장기로 확장될 수 있다. 단순히 제형을 바꿔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닌, 아예 치료제가 없던 난치 질환 치료의 첫 문을 여는 신약 개발 회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국가적으로도 새로운 연구·개발 생태계를 키우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곽상훈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바이오헬스케어부문 대표

생명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수명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극복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 바로 뇌와 관련된 질환들이다. 소바젠은 이러한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다. 질환의 원인이 되는 타깃 발굴, 치료 가능한 신약 후보 물질 개발, 그리고 이를 평가하는 플랫폼까지 3종의 플랫폼을 통해 뇌질환 치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배현민 KAIST 창업원장

소바젠 창업자 이정호 교수는 유전체 분석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로서 뇌 체세포 돌연변이가 뇌전증 등 다양한 난치병의 주요 원인임을 밝혀내는 등 학계의 패러다임을 혁신하고 있다. 회사를 창업해 연구 결과를 의료 기술로 발전시키는 이 교수의 행보는 KAIST를 넘어 바이오 헬스케어 산업에 큰 귀감이 되고 있다.

◆‘혁신창업의 길’에서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혁신창업 대한민국(SNK) 포럼’의 추천위원회를 통해 선정합니다. SNK포럼은 중앙일보ㆍ서울대ㆍKAIST를 중심으로, 혁신 딥테크(deep-tech) 창업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입니다. 대한민국이 ‘R&D 패러독스’를 극복하고, 퍼스트 무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기반한 기술사업화(창업 또는 기술 이전)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