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는 위기의 시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기 속에서도 위기 이후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오랫동안, 초중등교육에 종사하는 교육자들은 -혁신교육이라고 표현하건 행복교육이라고 표현하건- ‘공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데 모든 노력과 헌신을 원점으로 돌리는 하나의 블랙홀이 있다. 바로 대입과 대학 서열체제이다.
일류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과도한 경쟁은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꾸건, 그 변화를 공포 마케팅의 계기로 활용하는 사교육 산업을 팽창시키고, 학부모는 학원비 대고 학생들은 적응하느라 죽어난다. 교육입국(敎育立國)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교육을 통해 나라를 건설하고 발전시켰는데, 이제 교육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는 탄식이 그래서 나온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침몰할 건가.
다행히, 저출생 위기감 때문에, 과거보다는 파격적인 개혁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나 김세직 서울대 교수가 ‘비례경쟁 입시제도’를 서울대에 적용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의미 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나는 더 근본적으로 모든 왜곡의 출발점이 되는 대학의 서열체제 자체를 개혁하는 단계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수직 서열화에서 수평적 다양성으로
핵심 방향은 지금처럼 수직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 체제를 수평적 다양성의 체제로 개혁하는 것이다.
그동안, 멀리는 2000년대 초반 정진상 교수의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 제안이 있었고, 서울대 내에서도 2001년 장회익 교수 등의 ‘국립대 협력 및 개방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서울대 ‘자체 학부생 선발 중지’ 등 방안이 제시됐다. 나도 교육감 재직 시절, ‘대학공유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통합국립대학’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최근에는 김종영 교수의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제안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고 있다.
이런 제안들의 핵심 내용은 2가지이다. 하나는 9개 지역거점대학에 대한 대대적인 재정적 투자를 통해 서울대 수준으로 ‘상향 평준화’를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와 함께 서울대를 포함해 10개 대학이 ‘연합’체제를 만들어 대학 서열을 완화하고 ‘공유성장형 대학연합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런 개혁 방안은 초중등교육 정상화라는 의미를 넘어, 급속한 인공지능(AI) 기술 격변 시대를 맞아 글로벌 연구경쟁력을 강화하는 의미도 크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5대 광역경제권 연계
그런데 나는 더 나아가보자고 제안한다. 거점국립대학 지원,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지역균형발전의 국가전략과 연계해 더 큰 국가발전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다. 현재 국가균형발전 전략 구상에서 5대 ‘광역경제권’(수도권·충청권·호남권·동남권·대경권)이라는 거의 합의된 목표가 있다. 일류대학이 수도권에 집중되고, 서울대병원 등 최고의 의료기관이 서울에 몰려 있으며, 청년 직장들이 수도권에 몰려 있는 현실 속에서 나타난 불행한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5대 광역경제권이 ‘교육·의료·산업 클러스터의 자립적 생활권’이 되도록, 여러 국가정책을 상호 연계하고 결합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5대 광역경제권이 교육·의료·청년 직장 문제에 있어 일정하게 자립적인 지역 순환 생활구조를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울대 10개 만들기와 연계해, 5대 광역경제권별로 ‘서울대병원 수준의 최고 병원 5개 만들기’, 그리고 판교 수준의 첨단 산업 클러스터 5개 만들기를 결합할 수 있겠다. 이미 분당·판교·용인이 IT 및 R&D ‘중앙’이 되고, 부·울·경을 포함한 전국의 산업단지가 거의 ‘하청’ 작업실행지구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극복하고 ‘5개의 실리콘밸리’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거점국립대로 국책연구기관 이전
이런 구상이 현실화하려면 더 나아가야 할 것 같다. 나는 거점국립대학에 대한 지원 과정에서 각자 특성화 영역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을 하게 하고, 국책연구기관들을 이전해 대학을 교육·연구·창업 캠퍼스 타운으로 확장하는 방향을 제안한다. 현재 ‘국책연구기관’ 또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은’ 50개 정도가 있다. 이런 연구기관들이 가능한 범위에서 거점국립대학 캠퍼스 타운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방안으로는 국책연구기관과 거점국립대학 모두 ‘윈윈’이 될 것이다.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와 대학의 교육·연구가 시너지를 발휘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구원은 대학에 이중멤버십을 갖도록 하고, 연구 성과를 강의로 연결시키도록 한다. 대학 입장에서도 국책연구기관, 특히 이공계 연구기관의 경우 거대한 실험시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세계 대학평가의 교수충원율 지표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대만에 체류할 때 가장 부러웠던 것 중 하나는 대만 최고 연구기관인 대만중앙연구원(아카데미아 시니카)의 교수들이 대만국립대학 교수직을 가지면서 강의도 하고 두 기관이 협업하는 모델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거점국립대학의 특성화 영역과 국책연구기관이 결합하면, 지역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산업 클러스터를 국내·국제적으로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학·지자체·산업의 동반성장을 촉진하고자 했던 기존의 산학연 클러스터 지원 정책 등을 연결하고 고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지역회생 메가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이것을 기본 축으로 해 지역국립대학 및 지역사립대학들과 공생과 공유의 협력 연계체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경제침체와 무역전쟁 속에서 한국 경제의 어려움과 재정위기가 심각할 수 있다. 그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런 자립적 생활권을 만들어가는 개혁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지방자치가 일부 허용된 현재의 ‘전일적 단일국가’에서 미래의 ‘연방형 단일국가’로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