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은 감정을 뭉툭하게 만든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304명이 희생됐다. 배가 침몰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시민들은 슬퍼했고, 또 분노했다. 무능하고 진상 규명에 비협조적인 정부에 대한 분노였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손에 촛불을 들던 때가 있었다. 참사 11주기가 된 지금, 그 들끓었던 감정은 대부분 아련한 추모의 마음으로 변화했다.
오는 30일 개봉하는 영화 <리셋>은 세월호 참사를 새로 겪어내게 하는 다큐멘터리다. 캐나다 윈저 대학교의 영화 제작 교수인 배민 감독이 참사 직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등에서 촬영한 영상들과 이후 수년간 진행한 유가족·연구자·활동가·정치인과의 인터뷰가 시간순으로 보여진다. 촬영한 원본 영상만 400여 시간에 달한다고 한다.
영화는 황망했던 2014년으로, 분노했던 2016년으로, 누군가는 남아서 진실을 요구했던 2019년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영화 중반부터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희생자 고 문지성양의 아버지 문종택씨를 중심으로 단원고 희생자 박수현군의 아버지 박종대씨, 4·16 추모 합창단 등 유가족의 목소리를 담았다. 유튜브 채널 ‘세월호 유가족방송 416TV’를 운영하며 직접 영상을 촬영하는 문씨의 뒷모습은 외로워 보이지만 꿋꿋하다.

카메라에 담긴 세월호가 침몰한 동거차도 앞바다와 가족들이 희생자를 기다리던 팽목항, 단원고가 있는 경기 안산과 세월호 선체가 거치된 전남 목포 신항만은 애끓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배가 왜 침몰한 건지,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승객들을 왜 구조하지 못했는지.’ <리셋>은 이 기본적인 질문들에 책임을 피하기 급급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모습을 다시 꺼내어 보여준다.
<리셋>은 2019년 검찰이 참사 관련 의혹을 재수사하기 위한 특별수사단을 꾸리기 직전까지의 일을 담는다. 인터뷰이들은 ‘국가가 승객들을 일부러 구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등 음모론을 던지기도 한다. 배 감독의 카메라는 관찰자적 시점을 유지하지만, “300여 명이 물에 젖고 말았어야 할 사건”이 최악의 참사가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러닝타임 중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 영화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계획했던 촬영이 무산되면서 완성이 늦어졌다고 한다. 촬영일로부터 수년이 흘렀기에, 영화 속 날 것의 주장들이 논박해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의혹이 들끓었던 시기에 대한 기록으로 보인다.

설명하지 않으면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목포지방해양안전심판원이 참사 발생 10년 7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참사 원인을 조타 장치 고장과 복원력 부족 등 선체 내력 문제로 명시했다는 것이 지난 14일에야 알려졌다. 이는 2018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가 낸 종합보고서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나, 당시 선조위와 그 이후 꾸려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외부 충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등 ‘외력설’을 뚜렷하게 부인하지 않았었다.
참사를 책임지고 설명하지 않는 사회에, 유가족들은 아직도 거리에 있다. 영화에 출연한 단원고 희생자 고 임경빈군 어머니 전인숙씨는 22일 통화에서 “11년이 지났지만, 영화를 계기로 다시금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안산시 민주시민교육원 단원고 4·16 기억교실에서 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는 전씨는 세월호 참사 관련 마지막 민사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유족이다.
배 감독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재난을 대하고, 책임을 묻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했다. 그 질문은 2025년에도 유효해 보인다. 러닝타임 90분.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