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잘해와서 나름대로 자랑할 만한 성과도 있었고, 오랜 기간 같이해 온 적절한 리더가 있어서 잘 운영되던 집단이 어느 날 갑자기 큰 변화의 물결에 마주치게 되는 때가 있다. 이 와중에 조직을 위해 인내해 온 구성원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각자의 욕구와 서로에 대한 불만을 분출시키면서 조직이 와해되는 위기에까지 이르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2012년에 나온 영화 “마지막 4중주”는 기본적으로는 25년 경력을 가지면서 뛰어난 명성을 가진 “푸가” 현악 4중주단에서 콘서트에서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 연주를 준비하고 있는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를 떠올리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잔잔하지만 여운이 남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사실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은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가 충만하여 이 영화가 배경이 아니었다면 그다지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들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월켄(첼리스트 피터 역),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제2 바이올리니스트 로버트 역), 캐서린 키너(비올리스트 줄리엣 역) 등과 같은 배우들의 연기가 배역의 성격과 너무 잘 맞아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또한 주인공들이 만나고 조깅하던 뉴욕 센트럴 파크 연못 주위의 산책로는 나도 가본 적이 있고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배경이라 친숙하였다.
영화는 현악 4중주단의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첼리스트 피터가 나이가 들어 파킨슨병으로 진단받으면서 모두 오랜 동료이자 예전의 연인, 부부 사이인 멤버들이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전개된다. 이 상황에서 이제 나도 더 이상 제2 바이올린에 머물지 않고 제1 바이올린을 하고 싶다고 로버트가 말하자 제1 바이올린을 맡은 친구 대니얼은 대놓고 무시한다. 게다가 대니얼에게 자신의 딸 알렉산드라를 바이올린 레슨 시키려 보냈는데 둘이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버트는 피터의 집에서 연습하는 도중에 대니얼에게 주먹다짐을 하게 된다. 피터는 크게 화가 나서, 대니얼에게 현악 4중주단을 위하여 알렉산드라와 헤어지라고 하지만 사랑에 빠진 대니얼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피터는 대니얼이 지난 “푸가” 현악 4중주단 25년간의 활동에서 배운 것이 없다고 꾸짖는다. 이쯤 되면 거의 막장극이라서 멤버 간의 관계가 거의 구제 불능 상태로 가버린 것 같다.
하지만 딸 알렉산드리아가 “푸가” 현악 4중주단의 과거 인터뷰 비디오를 보면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다. 피터가 예전 동료이자 줄리엣의 어머니가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나자 줄리엣을 입양하여 딸처럼 키웠다는 사실과 “푸가” 현악 4중주단이 결성되어 유지되기까지 멤버들의 노력이 대단하였으며 자신을 포함하여 가족과 같은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니얼은 “One does not have to be the expense to be other(다른 사람 때문에 너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면서 “푸가” 현악 4중주단은 신경 쓰지 말고 자신과 새로운 4중주단을 형성하자고 한다. 이걸 보면 피터가 연주에는 뛰어나지만 냉정한 성격의 대니얼에게 25년간 “푸가”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이 뼈아프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다고 느껴진다. 결국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의 스승이자 아빠의 친구, 그리고 연인인 대니얼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멤버 사이의 갈등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첼리스트 피터의 마지막 공연이 되는 “푸가” 현악 4중주단의 공연이 열린다. 하지만 마지막 악장에서 피터는 파킨슨병의 증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저는 이만 중단해야겠습니다. 동료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군요”라면서 공연을 중단하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대신 자신이 추천한 새로운 젊은 첼리스트가 무대에 올라와 마지막 연주를 이어가게 된다. 자신은 객석으로 올라가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처럼 알렉산드라와 함께 “푸가” 현악 4중주단의 연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피터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멤버들은 “푸가” 현악 4중주단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서서히 해체의 길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피터는 자신의 파킨슨병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후임 첼리스트를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존경받는 리더가 사라지면서 조직이 해체되는 전철을 밟지 않도록 조직의 완결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하고 설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떠나는 뒷모습까지 아름다운 사람이다.
영화의 맨 처음, 피터가 학생들에게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악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연주자에겐 이렇게 오래 쉼 없이 연주한다는 건, 각 악기들의 음률이 맞지 않게 된다는 의미야.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연주를 멈출까? 혹은 모두가 불협화음이어도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해야 할까? 정답은 나도 몰라.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살면서 상대방이 내 뜻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아 같이 일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서로 간 조율할 수 있는 시간이 따로 배정된 것도 아니며, 중간에 리셋할 수도, 시간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베토벤은 모두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어도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맞추어야 음악을, 그리고 인생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을 죽기 1년 전에 작곡한 이 현악 4중주에서 나타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곡을 모티브로 하여 “마지막 4중주” 영화의 도입부에서 질문을 던지고 콘서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답을 보여준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불협화음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라고.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