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건조하고 강풍이 부는 2025년 3월,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난 산불이 비로소 진화됐다. 31명의 사망자, 5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불이 진화된 이후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재민은 3200여명에 달한다. 경남 산청군, 경북 의성군 등에 거주하는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한 이주민들 역시 산불 피해를 입었다. 인도네시아 국적 선원은 거주하던 경북 영덕군 마을에서 주민들을 직접 대피시키는 등 인명 구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태풍·홍수·지진과 같은 ‘자연재난’뿐만 아니라 화재·붕괴·폭발·다중운집 인파사고 등 ‘사회재난’ 역시 재난으로 규정한다.
정부와 국민에게는 재난을 막기 위해 노력할 책무가 부여된다. 특히 정부에는 재난 대응과 응급조치, 재난 복구 계획의 수립 및 시행 등 각종 의무가 있다. 이번 산불로 재난 사태가 선포돼 피해 지역에 긴급 지원이 가능하게 됐고, 특별 재난 안전 보조금 지급, 재난 구호 기금 지원 등이 이뤄질 예정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는 공공임대주택을 활용해 이재민에게 긴급지원주택을 제공하고 최초 2년간 임대료를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부담해 주거지를 잃은 이재민들을 지원하는 등 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 등에서는 저마다 재난 피해자 지원에 열심이다.
그러나 이주민은 재난 사태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배제돼 왔으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19 당시 외국인 대상 마스크 판매 제한, 지방자치단체의 재난지원금 지급 차별 등으로 국내 거주 외국인은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2022년 10월29일 이태원에서 발생한 다중인파 압사사고 당시 외국인 유가족들은 시신 인도 이후 한국 정부와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해 사고 사후처리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받지 못했고, 심리치료 등 유가족에게 제공된 중장기적 지원 역시 받지 못했다. 이번 산불 피해자나 이재민 중 외국인 숫자, 국적 또는 사용언어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이주민에 대한 재난에 관한 정보 제공 역시 매우 제한적이다.
최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대한민국 국가보고서 심의를 위해 제출된 119개 시민사회단체 합동 보고서는 정부가 재난 상황에서의 외국인 차별을 중단하고 외국인과 국민을 동등하게 처우할 것을 요구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상 정부의 정책 집행에 협조해야 할 국민의 책무는 외국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재난 상황에서의 지원 역시 공동체 일원에게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영덕에서 60여명의 마을 주민을 대피시킨 수기안토는 언론 인터뷰에서 “가족들을 한국에 데려와 함께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인명 구조의 공로를 세운 수기안토에게 거주(F-2) 체류자격을 부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기안토의 가족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정부와 지자체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재난지원금마저 그 가족들에게는 지급하지 않을 것이다. 수기안토의 가족이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동등한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