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아일랜드 이스터 라이징 2편
1916년 4월 아일랜드 의용군·시민군 2000여 명 무장봉기해
전쟁 중이던 영국, 정세 안정 위해 반란군 지휘부 즉결 처형
2016년 9월의 오코넬 거리는 온통 '1916 Easter Rising' 물결이었다. 천천히 달리는 버스에, 대형 건물 벽에, 북적거리는 펍(Pub) 입구에, 어디서나 플래카드, 대형 걸개 사진, 포스터 등이 펄럭였다. ‘Remember!’라는 구호가 쓰인 현수막, 빛 바랜 신문 기사, 흑백 인물 사진, 추모전 안내문 등이 넘쳐났다. ‘부활절(Easter) 봉기(Rising)’ 100주년을 맞아, ‘그날’을 잊지 않겠다는 아일랜드인들의 정서가 거리 곳곳에 묻어나 있었다.
리피(Liffey) 강을 내려다보며 오코넬 다리를 천천히 건너고 보면,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다니엘 오코넬 동상이 높이 솟아 있다. 그 뒤로 펼쳐진 오코넬 거리 초입에 이스터 라이징의 성지가 자리잡고 있다. 바로 더블린 중앙우체국, GPO(General Post Office)다. 1916년 4월에 아일랜드 의용군과 시민군 2000여 명이 영국에 대항해 무장봉기했던 사령부가 바로 이곳이었다.
두 명의 리더인 패트릭 피어스(1879~1916년)와 제임스 코널리(1868~1916년)가 무장군을 지휘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선언문도 낭독했다. 시민들이 대규모로 가담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그러진 않았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겠나’ 하는 무기력증 탓이었을 게다. 강력한 영국군의 무차별 사격과 포화에 밀려 일주일 만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체포됐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에게 밀리고 있던 영국은 후방인 국내 정세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아일랜드 반란군들에 가혹한 처분을 내렸다. 군사 재판을 열어 수많은 이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지휘부 15명은 체포 일주일 만에 모두 즉결 처형해 버렸다. 속전속결이었다.
그랬던 현장인 중앙우체국 정문에는 6개의 석조기둥에 100년 전의 탄흔들이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입장료 10유로를 내고 들어가 촘촘히 전시된 당시의 유물들과 대면할 수 있었다. 우체국 1층 전시관 입구에 붙은 대형 그림이 당시 상황을 처절하게 묘사한다. 벽을 사이에 두고 영국국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리더인 제임스 코널 리가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부상 당한 채 영국군에 체포된 그는 서 있을 수가 없어 의자에 앉은 채로 총살당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일랜드 인들은 분노하며 치를 떨었다.
이런 아일랜드 인들의 분노가 6년 후 독립으로 가는 원동력이 됐다. 극작가 버나드 쇼와 시인 윌리엄 예이츠도 대형 사진 속에서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지하 1층이 메인 전시관 한 켠에선 당시의 일주일 전투 상황을 재연한 20분짜리 영상이 반복해서 상영되고 있었다. 온갖 사진들, 군복과 장비들, 독립 선언문과 각종 유인물 등 유물과 자료들이 실감나게 배치돼 있었다.
입구에 있던 나이 든 안내원이 나에게 다가와 구석 한편으로 데려간다. 1916년 4월 29일 페트릭 피어스가 영국군에 체포될 당시의 정황을 담은 사진이 있었다. 그 아래 유리관에 오래된 편지지 한 장이 놓여 있다. 누렇게 색이 바랬고 꼬깃꼬깃 꾸겼다 펴진 편지지에 일곱 줄 문장이 보인다. 급하게 날려쓴 필체다. 동양인인 내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까 봐 안내원은 염려했던 모양이다. 나를 배려하여 띄엄띄엄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설명해줬다. 페트릭 피어스가 살아 생전 쓴 마지막 편지란다.
’더 이상의 살육과 시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항복한다. 동지들의 아까운 목숨을 더 이상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영국군에게 이만 항복한다. 동지들이여, 어떻게 해서든 목숨만은 보전해 주기를 바란다.’
페트릭 피어스는 체포된 다음 날인 4월 30일, 이 마지막 편지를 써서 동지들에게 전했다. 그리곤 3일 후인 5월 3일 처형됐다. 문인이었던 피어스는 더블린 작가 박물관에도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전시관을 나오면서 출구에 설치된 미술품 하나를 만났다. 기다란 대형 거울 위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수십 개 배치한 조형 작품이다. 작품 옆에 붙은 작가의 코멘트가 인상 깊다.
’그들은 우리와 하나. 1916년 부활절 주간에 희생된 우리의 젊은이들을 기억하며.(They are of us all. Remembering the young lives lost as a result of gunfire during Easter Week 1916.)’
1922년 아일랜드는 750년 만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북쪽 일부 지역은 제외된 남쪽만의 독립이었다. 북아일랜드는 옛날부터 영국 본토에서 넘어온 개신교도들이 수백 년 대를 이어오며 사회의 주류를 형성했기에 이들은 당연히 영국령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사회의 하류층으로 전락한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반쪽짜리 통일은 당연히 반대였다.
원래가 독실한 가톨릭인 그들에겐 비극적 통일이었다. 북아일랜드의 상류층인 영국 개신교도들과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아일랜드 분쟁의 역사는 이후 오랜 세월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1916년 영국군에 처형된 페트릭 피어스가 생전에 남긴 말을 보면 그는 100년 후의 조국 아일랜드의 번영을 정확히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은 솟아난다.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의 무덤으로부터 살아있는 국가는 솟아나는 것이다.(Life springs from death; and from the graves of patriot men and women spring living nations.)’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