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문'(15일 개봉)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갱년기라는 인생 후반의 위기를 통과하는 일본 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다.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만도 벅찬데, 병든 시아버지의 간호까지 떠맡은 여자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이 뿌리 깊은 남성중심주의, 거대 재난 등 일본의 현실 속에서 펼쳐진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직후, 주부 요리코(츠츠이 마리코)는 매일 아침 동네 마트에서 한정 판매 생수를 구하느라 전쟁을 치른다. 회사원 남편 오사무(미츠이시 켄)와 고교생 아들 타쿠야(이소무라 하야토)에게 방사능에 오염됐을지 모를 수돗물은 마시지 말라고, 빗물에도 맞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면서도 병들어 누워만 있는 시아버지의 죽을 만들 때는 수돗물을 사용한다.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철부지 아들, 아버지 간호를 아내에게 떠넘긴 남편, 노망이 들어 수시로 며느리 몸에 손을 대는 시아버지 때문에 안그래도 갱년기 때문에 힘든 요리코의 스트레스는 쌓여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깜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수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요리코의 모습은 평안해 보인다.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먼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요리코 혼자 사는 집안에는 '녹명수'라는 라벨이 붙은 물병이 가득하고, 제단에는 커다란 유리구슬과 물병이 놓여져 있다. 영혼을 정화시켜 준다는 물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것이다.
애써 가꾼 정원을 옆집 고양이가 망쳐 놓고,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마트에서 진상 고객 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지만, 요리코는 녹명수와 기도로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런 요리코의 마음에 또 다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난다. 암에 걸려 나타난 남편은 길지 않은 여생을 함께 보내고 싶다고 하고, 아들은 갑자기 청각장애 여자친구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정도면 '파문'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다.
요리코는 어떻게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이미 거액의 돈을 뜯어낸 것도 모자라, 특별 한정판 녹명수까지 권하는 사이비 종교는 과연 그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카모메 식당'(2007) 등으로 힐링 영화 장르를 구축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인생 최고의 각본"이자 "내 안의 심술 궂고 사악한 면을 모두 투영한 것 같은 영화"라고 자평했다. '카모메 식당'에서 소박한 힐링의 공간이던 식탁이 이 영화에서 가족 관계가 파탄 나는 아수라장이 되는 것만 봐도, 감독의 말이 이해가 된다.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남성중심주의, 지진이라는 거대 재난, 노노개호(老老介護, 간호가 필요한 노인을 노인이 돌보는 것), 사이비 종교, 장애인 차별 등도 영화가 드러내는 일본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다.
오기가미 감독이 영화를 만든 계기는 우연히 목격한 신흥종교 시설의 광경이었다. 비 오는 날, 신흥종교 시설 앞을 지나다가 문득 우산꽂이에 수천 개의 우산이 가득 채워져 있는 걸 보고 "무언가를 믿지 않으면 살아가기 불안한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다는 현실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돼야 한다는 가부장제에 짓눌려 신음하다가 현실 도피처로 사이비 종교를 택한 요리코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사이비 종교집단은 '녹명수'가 영혼의 레벨을 상승시켜 준다고 요리코를 '세뇌'하지만, 그를 구원으로 이끄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란 사실을 영화는 일깨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잔잔한 파문이 일고, 때론 거대한 파도가 덮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 '나'를 잃지 않으려면 편협한 시선 등 자신을 옥죄는 모든 형태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제를 블랙 유머에 실어 전한다.
"이 나라(일본)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게 답답해 죽겠다. 그래도 상황을 어떻게든 개선해보려고 발버둥치며 영화를 만든다"는 오기가미 감독에게 이 영화는 '나'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상 모든 여성에게 전하는 응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