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말을 향해가는 세상. 강력한 지진으로 캘리포니아의 절반이 물에 잠기고 도로 곳곳은 구멍이 뚫려 마비됐다. 인터넷은 끊긴 지 오래, 화산폭발, 해일, 산불까지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재난에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끝을 준비한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온 세상이 어둠에 갇혀가는 이 절박한 시간에 거리에서, TV와 라디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광고가 있다.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이 ‘척’이라는 남자는 누구일까, 작별 인사를 건네는듯한 광고 문구는 어떤 의미일까.

오는 24일 개봉하는 <척의 일생>은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괴이한 설정과 SF적 상상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삶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휴먼 드라마다. 3막부터 1막까지 거꾸로 흐르는 영화는 주인공 척(톰 히들스턴)의 인생을 시간의 역순으로 따라가며 미스터리 가득한 삶의 비밀을 풀어간다.
영화의 첫 장은 세계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다. 도시 곳곳에는 ‘척에게 감사한다’는 정체불명의 문구가 등장하고,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혼란 속에서 일상의 균열을 마주한다. 이 기묘한 현상은 SF적 재난 영화처럼 보이지만, 관객들은 곧 그 중심에 척이라는 한 존재가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세상의 종말처럼 보였던 장면들은 척의 내면 우주가 붕괴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차 사고로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에 자란다. 춤을 좋아하는 할머니와 숫자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한 집에는 금지된 공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다락방이다. 어느날 술에 취한 할아버지 앨비가 기묘한 말을 꺼낸다. “다락방에 올라가면 원하던 것보다 많은 것을 보게 된단다. 그래서 잠근 거야” “그저 기다리는 것, 그게 제일 힘든 부분이지”
앨비의 말은 척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열일곱 살이 된 척은 결국 비밀의 방의 자물쇠를 열게 된다.

영화는 SF와 공포, 휴먼 드라마를 결합한 장르적 실험 위에 삶의 유한함과 인생의 아름다움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올려놓는다. 한 사람의 인생은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동시에 칼 세이건의 ‘우주달력’의 한순간처럼 찰나일 수 있다는 역설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재난과 죽음, 비극의 장면조차 동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 전반의 흐르는 따뜻하고 몽환적인 미장센 때문이다. 파스텔톤 석양, 보석같은 밤하늘, 평화로운 피아노 선율이 빚어내는 장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은유하면서도 마냥 아름답다.

영화의 마지막 장인 1막에서는 <오큘러스> <앱센시아> <닥터 슬립> 등 다수의 공포 영화를 연출한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의 주특기가 발휘되며 오싹한 장르적 재미도 맛볼 수 있다. 독특하면서도 수려한 연출에 톰 히들스턴, 치웨텔 에지오프, 카렌 길런, 마크 헤밀 등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더해지며 삶에 대한 깊은 철학과 감동을 완성한다. 이 작품은 제49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비밀의 방에서 척이 본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후 척은 어떤 삶을 택했을까. 거창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의미 있다는 메시지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 영화는 묻는다. ‘당신의 세계는 어떤 일상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 순간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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