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도 착하게…‘갈등’ 거부하는 요즘 시청자들 [無자극이 뜬다①]

2025-01-03

경쟁보다는 과정 응원하는 시청자들

‘흑백요리사’ PD “참가자들도 성적보다는 하고 싶은 바 보여주는 것 중요하게 여겨”

‘도파민 중독 사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지고, ‘표현의 자유’가 커지면서 그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며 ‘도파민 중독’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지적에 답변이라도 하듯이 ‘순한 콘텐츠’를 향한 대중의 열망 역시 커졌다.

시청률은 5% 내외였지만, 뜨거운 화제성으로 올 한 해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가 된 ‘선재업고 튀어’, 8%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공감을 선사한 ‘엄마친구아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청춘의 마지막 여행을 담은 로드무비 형식의 ‘Mr.플랑크톤’ 등 ‘위로’를 선사하는 청춘물이 TV,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동남아 시청자들의 지지와 청춘스타들이 활약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물은 꾸준히 제작되는 장르지만, 최근에는 젊은 층을 넘어 중·장년층의 지지까지 받으며 ‘흥행작’에 등극하기도 한다. 삼각관계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기보다는 두 청춘의 풋풋한 감정 또는 주인공의 성장과 치유에 방점을 찍고 ‘힐링 드라마’로 사랑을 받는 것이 특징이다.

‘힐링 드라마’가 아닌, ‘긴장’과 ‘자극’이 필수인 서바이벌 예능에서도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청자들이 늘고 있다.

지난 9월 방송돼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계급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은 미션 중 하나였던 팀전을 선보인 이후 비판을 받았다. 팀을 나눠 경쟁하는 팀전은 서바이벌 예능의 단골 미션인데, 셰프들의 뛰어난 실력과 진정성에 감동하던 ‘흑백요리사’의 시청자들은 ‘억지 갈등을 조장한다’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었다. 실력을 겨루는 것이 서바이벌 예능의 기본이지만, 팀을 구성하는 것부터 시작해 더욱 어려워진 미션을 해결하는 과정까지. 다양한 갈등으로 더욱 큰 흥미를 유발하는 장치지만, 지금은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 것이다.

결국 ‘흑백요리사’를 연출한 김학민 PD는 “서바이벌이라 경쟁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했다. 레스토랑 팀전에서 그 부분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시청자들이 그렇게 비선호하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명하며 “시즌2에서는 방출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갈등을 유발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을 향해 ‘민폐’라는 날 선 반응이 쏟아지기도 한다. 지난달 종영한 tvN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후를 배경으로, 최고의 국극 배우에 도전하는 ‘타고난 소리 천재’ 정년이(김태리 분)를 둘러싼 경쟁과 연대를 그린 드라마로, 15%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음에도 정년이 캐릭터를 향해선 호불호가 있었다.

정년이가 ‘자신만의 방자’를 찾기 위해 연습에 빠지거나, 주인공보다 돋보이는 활약으로 극의 몰입도를 깨는 장면이 등장하자 ‘민폐 캐릭터’, ‘금쪽이가 따로 없다’는 싸늘한 시선이 이어졌다. 정년이가 국극 배우가 되기 위해 국극단에 입단, 실력과 함께 동료들과 함께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전형적인 ‘성장 스토리’를 표방했지만, 시청자들은 그가 유발하는 갈등에 ‘피로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더 짧게, 자극적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은 유튜브 플랫폼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해 가장 사랑받은 예능으로 꼽히는 ‘핑계고’가 그 예로, 자극적인 키워드로 이목을 끄는 것이 아닌 MC 유재석과의 ‘수다’를 오롯이 보여줘서 호평을 받고 있다. 1시간을 훌쩍 넘기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창작자들도 ‘달라진’ 경향을 실감 중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PD는 “자극을 위한 자극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건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렇다고 전개상 필요한 갈등을 모두 없앨 순 없다. 다만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무리하게 장치를 활용하거나, 극적인 전개를 선보이게 되면 쉽게 들키는 것 같다. 그런 것 없이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게 내용을 알차게 담는 것이 지금 통하는 콘텐츠라고 여긴다”라고 말했다.

시청자들의 니즈는 물론, 출연자들 또한 치열한 ‘경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흑백요리사’의 김 PD는 “옛날처럼 1등만 주목받는 게 아니더라. 모두가 그대로 인정을 받은 것 같다”면서 “최현석 셰프님이 ‘우승한 것보다 지금이 좋다’고 하시더라. 본인의 요리 가치관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우승했으면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고 하시더라. 요즘엔 나오시는 분들도 달라진 것 같다. 성적보다는 본인이 하고 싶은 바를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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