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바우 앞산이 훤합니다. 무성하던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나무 둥치에 소복이 쌓인 모습이 순합니다. 헐벗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공중을 베어 나누는 금들이 날카롭습니다. 이렇게 겨울에는 나무가 자신의 전부를 내보이며 우뚝 서는데, 죽은 듯 숨죽인 자태가 오히려 의연하군요. 들판의 풀들도 이와 다르지 않아 꼿꼿하던 허리를 꺾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산 것은 산 대로 죽은 것은 죽은 대로 평평해졌습니다.
이런 때를 틈타 밭을 둘러친 울타리를 손보는 게 요즘 제 일과입니다. 지난해는 고라니의 습격으로 200여 평 고추밭 하나를 잃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고추 순을 모조리 따먹은 바람에 그 밭 고추 농사를 그르쳤습니다. 가을에 다 접어들어서야 제 몫을 하기 시작하던 고추를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아내는 울타리 관리에 실패한 저를 탓했고, 저는 무도한 고라니의 악행을 규탄했습니다. 멀쩡했던 고추밭 수확을 할 때마다 보기 드물게 고추가 풍년이어서 더욱 속이 쓰렸습니다. 그래서 작심하고 겨우내 울타리 순찰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합니다. 아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고 놀려대지만, 농사는 매양 그런 일들의 연속입니다. 고라니뿐이겠습니까? 피하려야 피할 수 없고 알고서도 당하는 일들의 연속이 농사입니다. 저 들과 산의 나무와 풀처럼 능동적으로 순응하는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역동과 균형
자연 생태계는 생물(생물적 요소)과 무생물(비생물적 요소)이 상호작용하며 유지되는 복잡한 시스템입니다. 이러한 상호 작용 속에서 생태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일정한 안정성을 유지하는 상태를 동적 균형이라고 말합니다. '동적'이라는 말은 생태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균형’은 변화 속에서도 생태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상호 작용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생태계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끊임없이 반응하며, 가용한 에너지인 엑서지의 유지와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종이나 군집을 선택해 나갑니다. 이는 최대 엑서지 원칙으로 알려져 있는데, 생태계가 가능한 한 최대의 엑서지를 가지게 되는 방향으로 발달함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이 동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가 동적 균형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태계의 구성원은 이러한 시스템에 오로지 순응합니다. 그런데 이 순응은 객체로서의 순응이 아닙니다.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는 특정한 주체가 없기에 참여 구성원 모두가 상호의존적인 주체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생태계 구성원은 서로 복잡한 상승작용과 상충 작용을 거듭하면서 전체 생태계의 역동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구현해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사인 농업의 생태계와의 관련성은 어떨까요?
농생태학에서는 생태계의 동적 균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1) 다양성: 생물 다양성은 생태계의 안정성을 높이는 핵심 요소입니다. 다양한 종은 서로 다른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며, 환경 변화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줍니다. 따라서 농경지, 즉 농업 생태계는 작물, 가축, 미생물, 곤충 등 다양한 생물의 조합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 순환의 원리: 생태계 내에서는 물질과 에너지가 순환합니다. 유기물은 분해되어 무기물로 변하고, 이것은 다시 식물의 성장에 이용됩니다. 이러한 순환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의 밭에는 유기물 투입, 돌려짓기, 섞어짓기 등이 활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3) 상호작용: 생태계는 단순한 구성 요소들의 합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의 결과입니다. 농업 생태계에서는 작물과 가축, 작물과 곤충, 미생물과 토양의 상호 작용 등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이 농생태학의 핵심과제이자 목표입니다. 4) 자연적 조절 기능: 생태계는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충이 증가하면 따라서 천적도 증가하여 해충의 개체수를 조절합니다. 농생태학에서는 이러한 자연적 조절 기능을 활성화하는 방편을 중요시합니다.
농업 생태계의 동적 균형의 중요성
여러 차례에 나누어 풀과 풀 관리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풀 관리의 실패는 농업 생태계의 동적 균형 와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농경지의 총체적 다양성 확보는 풀에 의한 생산 교란을 최소화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농경지가 동적 균형이 깨지는 주된 요인은 특정 작물만 대량으로 재배하는 단일 경작입니다. 이는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해충 및 질병 발생 위험을 높여 생태계 균형을 깨뜨립니다. 또, 화학 비료와 농약 남용으로 토양 생태계가 파괴되고, 이는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키며, 환경 오염마저 유발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립니다. 따라서 농업 생태계의 동적 균형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1) 생물 다양성 증진: 다양한 작물, 가축, 미생물을 도입하여 생태계의 복잡성을 높입니다.
2) 유기물 순환 촉진: 퇴비, 녹비 등을 활용하여 토양 비옥도를 유지하고, 영양분 순환을 촉진합니다.
3) 천적 보호 및 생물학적 방제: 화학 농약 대신 천적을 활용하거나 생물학적 방제법을 사용하여 해충을 조절합니다.
4) 토양 건강 증진: 유기물 관리, 윤작, 최소 경운 등을 통해 건강한 토양을 조성합니다.
5) 지역 생태계 고려: 지역 생태계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농업 방식을 적용합니다.
이와 같은 노력은 농업의 지속 가능한 생산성을 중장기적으로 가능하게 해줍니다.
농업 생태계의 농생태학적 전환
경작지 안의 생물 다양성을 높여 보다 많은 종류의 작물을 심어 복합 작물 재배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면 해충, 질병, 기상 이변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농업 시스템의 생태적 회복력을 강화합니다. 이와 함께 토양 건강 개선, 덮개작물 사용, 최소경운 농업 등을 시행하게 되면 생태계 서비스의 질적 개선이 이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생태계 서비스는 1) 공급 서비스(식량, 수자원, 목재 등 유형적 생산물 제공), 2) 조절 서비스(대기 정화, 기후 조절, 재해 방지 등), 3) 문화 서비스(생태 관광, 휴양, 정서적 안정성 등), 4) 지지 서비스(토양 형성, 서식지 제공, 물질 순환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서비스는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해주는 매우 소중한 자산으로 안정적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수적입니다. 농업에서도 주변 환경 간의 유익한 상호 작용을 촉진하여 생물학적 해충 방제 및 영양소 순환과 같은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기능을 강화합니다. 이처럼 저하된 농업 생태계의 복원은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서비스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농업 생태계의 농생태학적 전환은 생태계 회복력, 생물 다양성과 다기능성을 향상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으로 가는 길을 제공합니다. 농업의 지속 가능성은 생산의 지속보다 생산 기반의 지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따라서 농업의 농생태학적 전환은 중장기적 과제이고 일반 농가가 개인적 결단으로 단기적 농업 생산성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농생태학적 전환이 도달하는 목표가 아니라 영구적 과정일 수도 있어 뚜렷한 성과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불안정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농업의 지속 가능성은 풀어야 할 과제임은 확실하지만, 농업의 생산성과 경제성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도 내재되어 있는 묵직한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근우 시민, 농부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