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경향] 경기도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 A씨는 최근 서울 강남에 있는 사교육 컨설팅업체를 방문했다가 고민에 빠졌다. 고교 1학년인 첫째의 생활기록부 컨설팅을 문의했는데, 업체가 안내한 어마어마한 비용과 마주하면서다. A씨는 “수행평가까지 관리해주는 프로그램은 학기당 300만원, 적성검사비만 따로 70만원”이라며 “중학생인 둘째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는데 말이 되는 금액인가 싶어 일단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는 (고교학점제) 선택과목 수강 신청 시작 전에 진로를 정해놔야 한다는데, 중학교 졸업한 지 석 달밖에 안 된 아이에게 무슨 진로를 정하라는 건지 생각할수록 황당하다”고 토로했다.
■학생들, 입시 유리 과목에만 몰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해 수강하는 고교학점제가 도입된 지 석 달째지만, 학교 안팎의 혼란은 커지고 있다. 학생들은 진로·적성 대신 입시 유불리에 따른 과목 선택에 내몰리고, 학부모들은 불안감에 사교육 시장을 기웃거린다. 교사들은 늘어난 업무에 고통을 호소한다. 고교학점제의 순기능이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은 입시 현실, 부족한 교육 인프라 문제가 정면으로 부딪치며 부작용을 낳고 있다.
지난 5월 8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전국교사노조연맹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원단체들이 모여 ‘고교학점제’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박영환 전교조 위원장은 “고교학점제 도입 이후 학생들은 조기에 진로 선택을 강요받고 불안한 학부모들은 사교육 컨설팅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학생과 학부모는 불안, 교사는 부족, 학교는 혼란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이보미 교사노조연맹 위원장도 “고교학점제는 교실을 실험실로 만들었고 학생들을 시험대에 세웠다”면서 “교실과 교육은 정치적 실험 대상이 돼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자신의 진로나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의 학점을 취득해 졸업하는 제도다. 올해 고교 1학년 학생들부터 전면 도입됐다. 1학년까지는 공통과목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2학년부터는 학생들이 듣고 싶은 선택과목을 골라 교실을 이동하며 수업을 듣는 형식이다. 그렇다 보니 과거보다 개설되야 하는 강의 수도 많고 그에 따른 관리 업무도 상당하다. 예컨대 고교학점제 이전 개설 과목이 50개였다면, 이후부터는 약 150개까지 개설되는 경우도 있다는 게 교사들의 설명이다.
당장 학생들을 가르치고 관리할 교사부터 턱없이 부족하다. 경기도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한 교사는 “특히 사회나 과학 교사들은 최소 두 과목, 많으면 4~5개 과목까지 가르쳐야 한다”면서 “어떤 선생님은 선택과목 때문에 1, 2, 3학년 전교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의 질 하락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 선생님들도 고통스럽고, 학생들에게도 피해가 간다”면서 “또 선택과목 수업은 일주일에 1시간인 경우가 많은데 1년에 30시간을 보고 아이들의 성취를 평가하고 장단점을 파악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지역별·학교별 격차를 더 키운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교사 수가 적은 농·어촌·산촌 지역 학교의 경우 애초에 개설할 수 있는 강의 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데다 지역 내 학교 밀집도도 낮아 공통수업을 진행하기도 어렵다. 이 교사는 “(농촌 지역에서) 스페인어, 인공지능(AI) 수업을 개설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결국 학생 수 많고, 선생님이 많은 학교에 학생들이 몰릴 수밖에 없고 지역소멸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2학년 선택과목부터 입시 직결
제도 도입 취지인 적성과 진로에 맞는 다양한 수강도 현장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얘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 부장을 맡고 있는 한 교사는 “당초 고교학점제 도입의 전제는 ‘패스(Pass) 앤드 페일(Fail)’ 방식의 절대평가 도입이었는데, 중간에 내신 5등급제로 가자는 식으로 논의의 방향이 바뀌어 결국 상대평가제도가 그대로 남았다”면서 “상대평가가 유지되면 학생들이 2, 3학년 선택 과목을 고를 때 가고 싶은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과목에 맞춰 수업을 듣지 적성을 고려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그는 “물리를 좋아하는 학생이 있더라도 물리 수업을 듣는 학생이 10명이 안 되면 1등급을 맞추기가 어렵다”라면서 “오히려 특정 과목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그 과목을 포기하는 일들이 생긴다”고 말했다.
김희정 교사노조연맹 고교학점제 태스크포스(TF) 팀장은 “5월부터 많은 고교가 내년에 개설할 과목을 확정하기 위해 수강 신청을 받는다”며 “개설 과목 수와 교실, 교원 수 등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부터 어느 학생이 어느 동아리 활동을 하고, 어떤 수업을 듣는가에 따라 대입이 완전히 달라진다”면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미래가 1학년 1학기 말까지 결정돼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 대학을 가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컨설팅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고, 선생님들조차 다 사교육 컨설팅을 받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선택과목 수강 신청의 경우 교육 인프라의 한계는 물론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 유지를 위해 한 번 신청한 뒤에는 철회나 변경하기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 팀장은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라는 게 한 달에도 몇 번씩 바뀌는데 1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고, 그 뒤부터는 입시에서의 불이익이 무서워 (진로를) 중간에 바꿀 수도 없다”며 “1, 2학년 때는 충분히 적성과 진로를 탐색하고 3학년쯤 결정해도 늦지 않은데, 자기가 뭘 하고 싶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1, 2학년이 끝나버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른 교실 공동체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교사들은 고교학점제 미이수자를 줄이기 위한 최소성취수준 보장 제도를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출결과 성적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충수업을 실시, 학생들의 낙오를 최소화해 보자는 취지와 달리 오히려 보충수업 대상자라는 낙인찍기가 학생들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수도권 고교 교사 B씨는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라는 시선이 아이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지 (교육당국이) 생각조차 못 하는 것 같다. 차라리 자퇴를 하고 싶다는 아이들도 있다”며 “언어적 한계로 학업 성취에 어려움이 있는 다문화 학생이 많은 지역이라 학생들이 이들을 더욱 색안경을 쓰고 볼까 두렵다”고 말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도 불안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내신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뀌면서 경쟁이 완화되는 효과는 분명하지만, 한 번의 실수가 가져오는 결과도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김희정 팀장은 “고등학교에 올라와 첫 중간고사를 보면 긴장해서 답안을 밀려쓰는 등 크고 작은 실수를 많이 한다”며 “5등급제로 바뀌면서 이런 실수 한 번에 1등급이 안 되고 좋은 대학에 못 가게 된다는 두려움이 상당하다 보니, 차라리 자퇴하고 정시를 준비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