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타령’, 이젠 역겹지 않나?

2025-05-06

한국 언론은 정치 기사에서 ‘배신’ ‘배신자’라는 말을 즐겨 쓴다. 정치권에서 워낙 많이 사용하니까 ‘따옴표 저널리즘’에 익숙한 언론으로선 어쩔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몇년 전 나는 전 국민의힘 의원 유승민 관련 언론 기사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언론이 이른바 ‘배신자 프레임’의 주범은 아닐망정 공범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1950년대 전반기에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상습적으로 무책임한 ‘빨갱이 타령’을 해대자 일부 언론은 매카시의 발언 다음에 괄호를 넣어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말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예컨대, 매카시의 어떤 주장에 대해 국무부는 이를 부인했다는 식의 추가 정보를 삽입하거나, 매카시의 주장 중 틀린 부분을 바로잡는 식이었다. 우리 언론도 ‘배신 타령’을 하는 정치인의 말을 소개하더라도 넓은 의미의 팩트체크 차원에서 괄호 속에 “공사 구분을 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따위의 해설을 달아주면 좋겠다.

유승민 개인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이건 의외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공사 구분 의식이 없는 부족주의적 사고와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역대 모든 정권에서 일어난 대형 비리 사건들의 이유였다. 한국인들의 끈끈한 부족주의 문화는 좋은 점이 많지만, 공적 영역에선 부정부패와 ‘정치의 이권화’를 초래한 주요 이유였다. 아무리 부족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낡아빠진 배신 타령만큼은 이제 제발 그만둬야 한다. 정말이지 이젠 지겹다 못해 역겹지도 않은가? 최근 내가 최악의 실언 또는 망언이라고 생각한 두 발언을 비판하면서 언론의 각성을 다시 촉구하고 싶다.

“윤석열은 의리의 사나이인데 한동훈은 배신의 아이콘이라는 말이 있다. 왜 윤 전 대통령 부부를 배신했느냐.”(홍준표), “(한동훈 전 대표가) 윤석열 전 대통령한테 하는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은 사람인가’ 사람의 도리, 인간의 기본에 대해 굉장히 다시 생각해 봤다.”(김문수)

내가 평소 두 정치인을 낮게 평가했다면 굳이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을 것이다. 발언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지 않으면서 일반론으로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보수 정치인들 중에선 살아온 삶의 궤적이나 무게감에서 출중한 점이 있어 많은 보수 유권자의 지지와 존경을 누려왔다. 자신의 이름값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씩 반론을 펴보겠다.

배신 타령은 ‘지도자 숭배주의’

누가 윤석열을 의리의 사나이라고 하는가? 윤석열이야말로 배신의 아이콘이 아닌가? 그는 국민을 배신했고 특히 자신을 지지해준 유권자들을 배신했다. 한국 민주주의를 배신했고 국익을 배신했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사람들을 배신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적반하장(賊反荷杖)마저 저질렀다. 추악하고 야비한 배신이었다. 공적 배신인 동시에 사적 배신이었다.

윤석열은 지난 4월9일 자신을 찾은 친윤 정치인들에게 “대통령이 되면 사람을 쓸 때 가장 중요시할 것은 충성심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했다.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수시로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오죽하면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12년 전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스타 검사가 되었고, 그 덕분에 결국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사람으로서 그게 할 말인가.

윤석열은 나중에 자신의 그 발언에 대해 “후배들한테 사람에 충성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인사권자, 상사에 그런 사람들에게 충성하면 안 되고, 국민과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임관한 지 얼마 안 된 친구가 검사장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나한테 혼났지. 검사장에게는 충성하는 게 아니라, 존경하는 거야”라고 설명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윤석열은 “위법한 지휘·감독은 따를 필요가 없다” “지시 자체가 위법하면, 따르면 안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랬던 사람이, 자신의 그런 지론에 충실했던 한동훈을 왜 그렇게 미워하고 저주했는가?

배신은 윤석열·김건희가 저지른 것일 뿐, 한동훈은 그들의 사죄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 무속과 탐욕과 아집에 심취해 국정운영을 망치는 길로 질주함으로써 국정운영에 참여했던 사람들마저 사지로 몰아가는 작태에 대해 “그러면 안 된다”고 직언을 한 게 왜 배신인가? 그 직언을 따랐으면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몰락했겠는가? 이걸 강한 어조로 지적해줘야 할 홍준표가 어쩌자고 정반대로 윤석열·김건희를 옹호하고 미화해주는 길로 나섰단 말인가!

공사 구분 못한 김문수가 틀렸다

“공무원 생활 20년 하면서 이런 간신들은 처음 봤다.”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이 한창이던 2023년, 실무를 맡고 있던 한 정부 당국자가 한 말이라고 한다. 윤석열은 그런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상황을 오판했고, 결국 부산은 2차 투표도 가보지 못한 채 29표 대 119표로 대패했다. 그의 모든 정책이 다 이런 식이었다. 김문수는 이런 간신배들이 사람의 도리와 인간의 기본을 지키는 충신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간 윤석열에 대해 쓴소리를 얼마나 했는가? 아니면 윤석열이 하는 모든 게 다 아름답고 좋았는가?

김문수는 ‘87체제 바꿀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그 핵심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김문수는 오래전부터 ‘제왕적 대통령제의 청산’을 주장해 왔는데, 윤석열 정권이 망한 이유 중 가장 큰 게 여당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이 대통령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의 자세를 갖고 있었던 거라는 데에 동의하는가? 한동훈이 그런 노예의 자세를 거부한 게 ‘저 사람은 사람인가’라는 말을 들어야 할 이유란 말인가? 김문수의 논리에 따르자면, 김문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선 자신을 장관으로 발탁해준 윤석열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윤석열 사면’을 하겠다고 공약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군가 ‘김문수는 사람인가’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기승을 부리고 있는 배신 타령의 본질은 ‘지도자 숭배주의’다. 이는 묘하게도 지도자의 배신은 문제 삼지 않는 노예근성에 오염돼 있다. 지도자가 이전에 했던 약속을 다 어기면서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숙청하는 배신을 저질러도 강성 지지자들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낸다. 게다가 그 배신에 대한 작은 저항을 가리켜 배신이라고 욕하는 적반하장까지 저지른다. 죽으라면 잠자코 죽지 왜 살겠다고 발버둥치느냐고 매를 때리는 격이다.

한국은 배신 타령이 난무하는 나라이지만, 신의의 가치는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다. 사람들이 신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배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배신 타령은 지도자 숭배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강성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우두머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언행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지, 신의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게 아니다. 이 우두머리들은 아무리 신의를 짓밟아도 괜찮으며 심지어 박수까지 받는다. 화끈하고 박력이 있어서 좋다나. 앞으로 배신 타령은 노예근성이라고 단호하게 말해줘야 한다.

단테는 <신곡>의 ‘지옥 편’에서 배신을 가장 비열한 악덕으로 보았다. 지옥의 여러 단계에선 밑으로 내려갈수록 고문이 더 심해지는데, 최악의 고문이 가해지는 맨 아래 아홉 번째 지옥이 바로 배신자를 응징하는 곳이다. 사적으로, 특히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단테가 옳았다고 말할 것이다. 배신을 당한 분노와 고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김문수는 한동훈과의 토론에서 보통 사람들도 갖고 있기 마련인 그런 상처를 이용하기 위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후배’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러나 김문수는 틀렸다. 나빴다. 공직을 출세와 축재의 도구로 간주해온 일그러진 엘리트 문화를 지지하고 맹종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공사 구분을 해줘야 한다. 김문수의 문법을 따르자면 공익제보자는 나쁜 배신자가 되고 만다. 아니 정의를 위한 모든 직언자가 다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되고 아첨에 능한 간신배들만 칭찬받고 득세하게 된다. 망국으로 가는 길이다. 정녕 그런 사태를 원하는가? 맹목적인 우두머리 숭배를 반대한다는 김문수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적절한 기회에 공적으로 사과나 해명을 하는 걸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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