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일출·설경 삼박자…5번 가면 자녀가 서울대 간다는 산

2025-01-06

진우석의 Wild Korea ㉑ 백덕산 눈꽃 산행

폭설 내린 다음 날 새벽, 백덕산(白德山, 1350m)에 올랐다. 동쪽 하늘에 걸린 붉은 띠를 뚫고 불끈 해가 떠올랐다. 추위에 떨다가 따뜻한 볕이 얼굴에 비치자 ‘괜찮아, 괜찮아. 새해에는 모든 게 잘될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새해에는 높은 산에 올라 새 희망을 품어보자.

동심 자극하는 겨울왕국

12월 말,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영서 지방에 많은 눈이 퍼붓고, 다음 날 쨍하게 맑단다. 눈꽃 산행을 하기 완벽한 날씨다. 백덕산과 태기산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백덕산을 선택했다. 태기산은 정상까지 임도가 놓여 초보자 코스로 제격이다. 평창과 영월에 걸쳐 있는 백덕산은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인데도 찾는 이가 드물다. 백덕(白德)이란 이름처럼 겨울철 설경이 아름답고, 1350m 높이에서 바라보는 강원도 내륙의 조망이 탁월하다. 지난 겨울에 쓰던 아이젠과 스패츠를 챙기며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 평창으로 가는 도로는 말끔하게 제설됐다. 밤새 눈을 치운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살살 차를 몰았다. 문재쉼터 입구의 등산로는 눈으로 덮였다. 할 수 없이 운교리 먹골을 들머리로 삼았다. 큰 주차장은 차 대신 눈으로 가득했다.

딸깍. 헤드 랜턴을 켜자 쌓인 눈에서 무언가 반짝반짝 빛났다. 유리처럼 투명한 눈 결정이다. ‘지구 북쪽 끝 눈의 나라로 눈의 여왕을 만나러 가지 않을래?’ 결정들이 소곤소곤 비밀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듯 동심에 젖어 있다가 뺨을 후려치는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라처럼 목을 웅크린 채 엉금엉금 걸었다.

촬촬. 먹골 계곡의 물소리가 들린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 쫑긋 귀가 선다. 랜턴을 껐다. 기다렸다는 듯 어둠이 달려들고,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하다. 번쩍. 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렸다. 궤도를 벗어난 별똥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생을 다한 후 우리가 가는 데와 같은 곳일까. 걷다가 가끔 랜턴을 끄고 고개 들어 별을 바라봤다.

N 자 모양 서울대나무

임도를 벗어나 능선에 올라붙자 길이 사라졌다. 바람이 능선에 수북하게 눈을 쌓아놓았다. 이제부터 러셀(눈을 헤치고 나가며 길을 내는 기술)을 해야 한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다. 동행했던 여행작가 김영수 씨가 길을 낸다. 발이 허벅지까지 빠진다. 그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포갠다. 걷기가 한결 쉽다. 혼자라면 겁났을텐데, 겨울 산을 오를 때 동료는 주머니 속 핫팩처럼 따뜻하고 든든하다.

동쪽 하늘에 붉은 띠가 걸렸다. 날이 맑아 띠는 길고도 붉다. 러셀 하느라 속도가 늦어져 정상에서 일출 맞으려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 전망이 나오는 장소를 찾아봤지만, 나무가 빽빽해 시야가 열리지 않았다. 왼쪽으로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큰 소나무가 시야를 가렸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일출을 볼 수 있겠다. 해가 붉은 띠를 뚫고 벙긋 떠올랐다. 해가 비추는 설산은 옅은 화장을 한 새색시 얼굴처럼 곱다.

삼거리에 닿았다. 먹골과 문재 쉼터에서 오는 길이 여기서 만난다. 정상까지는 500m쯤 남았다. 능선에는 신갈나무 고목이 많은데 가장 특이한 게 일명 ‘서울대나무’다. 나뭇가지가 N자 형태인 서울대 정문처럼 절묘하게 굽어 있다. 이 대문으로 5번쯤 드나들면 자녀가 서울대에 간다는 말이 있다.

시야가 툭 터지는 곳이 정상이다. 순백의 눈을 밟으며 정상 등정의 기쁨을 누린다. 백덕산은 정상에서만 전망이 열린다. 동쪽 먼 하늘에 걸린 능선은 정선의 가리왕산이다. 1500m 높이의 능선이 그리는 곡선이 한없이 부드럽다. 서쪽 멀리 삼각형처럼 봉곳 솟은 봉우리는 치악산 비로봉(1228m)이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첩첩 산줄기를 감상하다 보면, 세상의 중심에 선 듯 호기로워진다. 따뜻한 볕을 쬐며 마시는 커피 한잔이 향기롭다.

속절없이 사라져 더 애틋한 눈

정상에 한참 머물다가 하산길에 들어섰다. 서울대나무 근처에 눈이 수북하게 쌓인 곳이 있다. 이런 곳에서는 드러눕기의 낭만을 놓칠 수 없다. 눈밭을 등지고 두 팔 벌리고 섰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체공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1초도 안 된다. 푹, 소리와 함께 눈가루가 분분히 날린다. 눈밭이 받아주는 푹신한 느낌이 좋다. 누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시퍼런 하늘을 배경으로 눈꽃 핀 나뭇가지들이 탐스럽다. 개구리처럼 손발을 움직여 본다. 심해의 산호 사이를 헤엄치는 기분이 이와 같지 않을까.

왔던 길을 되짚어간다. 내 발자국에 발자국을 한 번 더 얹는다. 올라올 때 어두워 잘 보지 못했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능선에는 신갈나무 고목들이 많다. 생태가 잘 보존됐다는 뜻이다. 1시간쯤 내려와 낙엽송 숲에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이제 종점이 얼마 안 남았다.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리며 은빛 커튼을 드리운다. 예사롭지 않은 풍경에 문득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애써 쌓은 눈이 바람에 날려 속절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출발점에 되돌아왔다. 바람결에 홀연 사라진다 해도 풍요로운 눈을 인생에 차곡차곡 쌓는 것이 또 내 할 일이라고 다짐해 본다.

여행정보

백덕산은 강원도 평창과 영월에 걸쳐 있지만 교통이 편한 평창 운교리를 들머리로 삼는 게 좋다. 방림면에서 먹골행 버스가 하루 두편 뿐이라 대부분 자가용을 이용한다. 코스는 문재 쉼터~사자산~정상~먹골 주차장. 15㎞ 6시간쯤 걸린다. 눈이 많이 왔을 때는 먹골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왕복하는 게 좋다. 문재 쉼터에 주차할 수 있고, 먹골 등산로 입구에 큰 주차장이 있다. 백덕산에서 가까운 횡성 안흥면은 찐빵의 성지다. 팥이 달지 않고 빵이 쫄깃한 ‘면사무소앞안흥찐빵’을 추천한다.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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