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대한민국은 ‘노벨문학상 보유국’ 또는 ‘소설가 한강 보유국’이 되었다. 많은 국민이 자신이 ‘한국인’인 게 자랑스럽다는 반응을 보였고, 책을 사려는 ‘서점 오픈런’ 등 열풍이 불었다. 1주일 만에 종이책만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필자도 갑자기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을 잊고 있었던 책을 읽는다는 즐거움이 생각났다. 언제나 우리 곁에는 서울시치과의사회 전자도서관이 함께한다는 것도 생각났다. 때마침 한강 작가의 작품들도 추가되어 작가만의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경험할 수 있고, 한국 문학의 세계적인 위상도 체감해 볼 수 있다.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라는 제목에 끌려서 읽게 되었다.
1926년 10월 30일 한 부부가 일본 교토에 도착했고 옛 제국의 수도를 거닐면서 색색이 가을 정취가 물든 풍광을 음미했다. 19년 뒤 1945년 5월 10일 열세 명이 원자폭탄 표적 선정위원회에 참석하였다. 첫 번째 폭탄은 교토에 떨어뜨리기로 했다. 교토는 새로운 군수공장들이 들어선 지역이었고 옛 수도이기 때문에 일본에 어마어마한 정신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위원회는 세 곳의 예비 후보지를 정했다. 히로시마와 요코하마, 그리고 고쿠라였다. 전문가들은 교토의 세부 지도를 보고 도시의 철도 조차장을 핵폭발의 그라운드 제로(핵폭탄이 폭발할 지점)로 결정했다. 그 지역은 부부가 20년 전 머물던 지역이었다. 1945년 8월 6일 코드명이 ‘리틀 보이’인 원자폭탄이 교토가 아닌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졌다.
헨리 L. 스팀슨은 미국 육군 장관이었다. 전시 작전을 감독하는 민간인으로는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교토는 20년 전 스팀슨 부부가 여행했던 곳이었고 폭격 대상지에서 제외되었다. 그 대신 첫 번째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1945년 8월 9일 10시 58분 나가사키 상공에 미군 B-29 폭격기 3대가 출몰했다. 공습에 익숙한 시민들이 방공호로 대피했지만, 대피가 무의미한 폭탄이 떨어졌다. 3일 전 히로시마에 떨어진 신형 폭탄이었다. 순식간에 24만명의 나가사키 인구 가운데 61%가 죽거나 다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나가사키 주민뿐만 아니라 원폭을 직접 투하한 미군도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애초 원폭 투하 예정지는 나가사키가 아닌 고쿠라였기 때문이다. 미군은 원폭의 위력을 확인하기 위해 평탄한 지역과 통상 폭격을 받지 않은 도시를 선정했는데, 고쿠라가 이 조건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나가사키는 산이 많아 이 조건에 부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폭격기가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미군 폭격담당자가 목표물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고쿠라 상공에 짙은 검은색 연기가 뒤덮여 있었다. 원폭 투하 조건 가운데 목표물을 반드시 폭격담당자가 맨눈으로 확인한 다음 투하하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폭탄을 엉뚱한 데 떨어뜨릴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두 번째 표적을 공격하기로 했다. 나가사키에 가까이 갈수록 역시 구름으로 덮여 시야가 흐렸다. 연료가 다 떨어져가자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기로 했고, 마지막에 구름이 걷혔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폭탄이 떨어졌다. 오늘날 일본인은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재앙에서 벗어났을 때 ‘고쿠라의 행운’이라고 한다.
임의적으로 일어난 사소한 변화와 언뜻 무작위로 보이는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의 인생 경로를 바꾸어 놓을 수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스팀슨 부부가 교토로 가는 기차를 놓치고 대신 다른 곳에서 휴가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고쿠라를 향했던 폭격기가 몇 분 늦게 이륙했고 구름이 걷혔었다면 어땠을까?
서울치과의사회 소송단이 제기했던 비급여 자료 공개 및 보고제도와 관련된 위헌확인 헌법소원 결과가 2월이 아닌 더 늦은 시기에 나왔고 기각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비급여 진료비 공개를 이용한 민간 플랫폼이 활개 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저수가를 내세운 광고가 치과계를 뒤덮지 못하도록 차단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떤 일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