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민권익위원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영란 전 위원장일 것이다. 그가 입안한 청탁금지법은 ‘김영란법’으로 불렸다. 이 법 8조4항은 ‘공직자 등의 배우자는 공직자 등의 직무와 관련하여 동일인으로부터 1회에 100만원 또는 매 회계연도에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 등을 받으면 안 된다’고 규정한다. 공직자는 배우자가 이런 금품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소속 기관장에게 서면으로 신고해야 한다(청탁금지법 9조).
재미교포인 최재영 목사가 2022년 6~9월 김건희씨에게 국정자문위원 임명 등의 청탁과 함께 300만원 상당 디올백과 179만원 상당 샤넬 화장품 세트 등을 선물했다. 대통령 윤석열 부부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사저에 머물 때다. 김씨가 받은 청탁은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 직무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고, 윤석열이 청탁금지법상 신고 의무를 제대로 이행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권익위 전원위원회는 지난해 6월10일 ‘청탁금지법상 공직자의 배우자를 제재할 법적 규정이 없다’며 사건을 수사기관에 이첩·송부하지 않고 종결했다. ‘대통령 부인은 고가의 선물을 얼마든지 받아도 된다는 얘기냐’는 비난이 권익위에 빗발쳤다. 두 달쯤 뒤인 지난해 8월8일, 이 사건 실무 책임자였던 김모 당시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가 자살했다.
김 전 국장이 숨지기 전 가족에게 남긴 카카오톡 메시지가 한겨레 6일자에 보도됐다. 고인은 이 글에서 “법 문언도 중요하지만 상식에 어긋나지 않은 처리도 중요합니다” “가방 건 외의 사건들은 최선의 결과가 나왔다고 자부합니다”라고 했다. 유족에게는 “부패방지 분야에 한평생을 바쳐온 내 과거가 다 부정당했다”는 토로도 했다고 한다. 권익위가 명품백 수수 사건을 종결처리한 데 대한 당혹감·자괴감이 느껴진다. 공무원 직업윤리에 충실하고자 했기에 그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한 ‘유서’였다.
김건희씨가 이날 피의자 신분으로 김건희 특검에 출석했다. 그가 받는 16개 혐의 중엔 그 디올백 수수 건도 있으니 머잖아 진상이 드러날 것이다. 김 전 국장 사망 1주기에야 찾아온 지연된 정의인 셈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을 새삼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