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 시절부터 ‘제왕 등극’ 속셈 드러낸 불행의 싹…대통령 당선 이후 정점 찍은 사변이 ‘12·3 내란 사태’
언론도 제 역할 다하지 못해…‘대통령이 법치·민주주의 질서 위협’ 깊은 경각심 갖고 밀착 감시했더라면 아쉬움 남아
건강한 사회는 여러 단계서 ‘위험 징후’ 차단할 수 있어야…현재 위기 슬기롭게 극복한다면 더 큰 위기 미리 방지할 수 있어
을사년 새해가 밝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 밝지 못하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상중(喪中)이다. 지난해 12·3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죽다가 겨우 살아났으나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에 놓여 있다. 새해를 사흘 앞둔 지난달 29일에는 제주항공 참사가 터져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공식적인 국가애도기간은 1월4일까지였지만 그 슬픔과 충격이 4일 이후로 갑자기 사라질 리는 없다.
내란이든 대형 참사든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를 따져보게 된다. 이때 사전 경보 시스템이 얼마나 잘 작동했는지도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요소이다. 선진화된 사회일수록 국가적인 대형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그 징후를 미리 발견하고 경고하는 시스템이 잘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대형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다.
위법한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돌이켜보면 계엄에 대한 경고가 몇 차례 있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일부 야당 국회의원들은 지난여름부터 직접적으로 계엄 가능성을 지적했었고, 이번 내란 사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용현 전 국방장관에게 국회에서 직접 따져 묻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계엄의 주체가 될 만한 사람들의 말만 믿었던 것일까?
한 가지 요인을 꼽자면 권력 감시를 자신의 존재이유이자 사회적 소명으로 여긴다는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대다수의 한국 언론이 윤석열 정권 편에서 여론을 호도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정부 때 환율 1200원과 주가지수 3000에 나라가 망한다고 요란했던 언론이 작년에는 환율 1400원과 주가지수 2500에도 태평성대를 노래했었다.
윤 대통령의 왜곡된 법 인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이나 주가조작 의혹은 윤석열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예컨대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 같은)이었다면 수백 차례의 압수수색과 강력한 수사로 기소까지 이어졌을 일이었다. 특히 주가조작 의혹은 개인의 범죄로만 끝날 문제가 아니라 한국 증시 전체의 신뢰성과도 직결되는 사안이다. 생각해 보라. 주가조작의 강력한 의혹이 있는 사람을 권력의 가족이라 해서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외국 투자자가 한국 증시에 투자하려 할까? 윤석열 대통령의 김건희 여사 비호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증폭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윤 대통령은 정적에게는 무한히 엄격하게 법을 적용해 집행까지 했던 반면, 자신의 가족에게는 솜방망이로 일관했다. 윤석열이 몸담았던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가 자신들의 위법행위에는 한없이 관대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국회에서 탄핵되고 공수처와 검찰에서조차 내란 수괴로 지목된 이후에도 윤 대통령이 무죄를 주장하는 데에는 이런 연원이 있는 듯하다. 아마도 윤 대통령은 지금 자신이 지은 죄를 부정하고 있다기보다 자신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만약 다수의 언론이, 법의 해석과 적용에 자의적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성을 높게 보고 깊은 경각심으로 권력을 밀착 감시했더라면, 내란 일당이 무도하게 친위 쿠데타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현실에서는 그 반대로, 어차피 언론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이 내란을 감행하는 데에 가속페달을 밟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짧은 계엄 상황에서 계엄군이 일개 유튜브 방송사로 출동한 반면 기존의 유수 언론사에는 병력을 재빨리 전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국 언론지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 언론은 윤석열이라는 내란 수괴를 키운 토양이고 요람이었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지난 대선 기간에 이미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가 많았다. 대통령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을뿐더러 선거 기간 동안 보인 각종 언행도 불신을 키웠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회 때 손에 임금 왕(王) 자를 쓰고 등장한 것(2021·10·1)도 대표적인 사례이다. 단지 손에 王자만 쓴 것이 아니었다. 전두환이 정치를 잘했다(2021·10·19)거나 독재정권이 국민들 경제는 확실히 살려놨다(2021·12·29)는 등 독재를 옹호하는 발언을 쏟아냈었다. 더 나아가 정권을 잡으면 모든 정보와 수사라인을 동원해 인사검증을 하겠다(2021·12·14)거나, 집권하면 전 정권을 상대로 적폐청산 수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2022·2·9). 사실상 인사사찰과 정치보복을 공언한 셈이다. 실제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전 정권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 단지 과거의 독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행태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국정운영에 반영할 의지가 강력했음을 시사한다. 유명한 경제전문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서는 대선 후보들 사이의 정책토론 무용론을 펼치기도(2021·12·25) 했는데, 대화와 토론, 타협과 설득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경시하는 윤 대통령의 한 단면이었다.
실제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2년 반을 돌아보면 대선 후보 당시 그의 문제적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나 설화 수준이 아니었다.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제왕 그 자체가 되겠다는 속셈을 후보 시절부터 가감 없이 보여주었고 대통령이 돼서는 그 속셈을 현실로 옮겼다. 12·3 내란 사태는 그 정점을 찍은 사변이었다.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을 군사적으로 자극해 최소한 국지전이라도 벌이려고 했던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후보 시절에 북한이 핵 탑재 미사일을 준비하는 조짐이 보이면 선제타격하겠다(2022·1·11)는 입장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러니까 12·3 내란 사태의 싹은 이미 지난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기 전부터 자라고 있었다. 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이 불행의 싹을 알아보고 ‘윤석열 대통령’이 초래할 위험을 수차례 경고했었다. 2019년의 ‘검찰 쿠데타’로 정계에 등장한 사람이 자신의 제왕적 욕망을 여러 차례 공공연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그의 집권은 필연적으로 친위 쿠데타나 국지전 유발로 이어질 것이라고 염려하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망상이 아니다. 국민과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대선 후보 시절에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 그의 폭주를 제어할 장치가 없으리라는 점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전경고를 무시하고 윤석열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문제가 많은 대선 후보를 사전에 걸러내지 못한 것은 윤석열 후보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때 ‘BBK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고 고백한 이른바 ‘광운대 동영상’이 선거 며칠 전에 공개됐음에도 검찰은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무혐의로 처리했고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한 뒤 BBK의 최대 투자자였던 자동차 부품회사 다스의 실소유주로 밝혀졌고 횡령과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2007년 대선에서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으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셈이다. 만약 그때 보다 철저하게 후보를 검증했더라면 대통령이 퇴임 뒤 구속 수감되는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철저한 검증의 전통이 잘 세워졌더라면 내란 사태의 싹을 미리 없앨 수도 있지 않았을까?
2007년 12월 새누리당의 대변인으로서 광운대 동영상에 대해 주어가 없다며 이명박 후보를 옹호했던 나경원 의원은 17년 뒤 내란 사태 때에는 야당 지지자들 때문에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하는 국회에 못 들어갔다고 변명했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은 일제 잔재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얄궂게도 이명박 시절에 한 자리씩 했던 사람들이 윤석열 정부에서 권토중래했다. 어쩌면 우리는 오래전 주가조작 사건으로 막을 수 있었던 일을 지금 국가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내란 사태로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사회든지 독재나 제왕을 꿈꾸고 사기를 치고 주가를 조작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가 권력을 휘두르며 인사를 하고 정책을 바꿔 세상을 망치는 것이다. 건강한 사회는 바로 이 경로를 여러 단계에서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유해한 바이러스가 인체 안에서 증식하지 못하도록 면역체계가 작동하는 것과도 같다.
좁게 보자면 윤석열 대통령을 후보로 영입했던 국민의힘부터 철저하게 반성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파면되고 구속 수감된다면, 자당 계열 출신의 대통령이 2연속으로 파면(박근혜-윤석열)되고 3연속으로 수감(이명박-박근혜-윤석열)되는, 단군 이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쓰게 된다. 본인들이야 온갖 사정과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국민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이런 불행한 사태를 초래한 자당의 존재이유와 철학, 작동 시스템, 그리고 ‘면역체계’ 자체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 벌써부터 애꿎은 대통령제나 87년 체제에 책임을 돌리는 모습도 보이는데, 그건 처절한 자기반성을 한 뒤에라도 늦지 않다.
12·3 내란 사태를 막은 것은 결국 80년 광주였다는 평이 있다. 수많은 시민들과 심지어 계엄에 동원된 다수의 군인들까지도 광주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기에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2025년 우리의 선택이 미래 어느 시점의 대한민국을 다시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 오늘의 위기를 슬기롭게 그리고 철저하게 극복하는 것이 미래 대한민국의 더 큰 위기를 미리 방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