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드 스콧은 노예였다. 사건의 배경과 복잡한 법리 설명을 빼고 이야기하자면, 그는 돈으로 자유를 사는 데 실패하자 1846년 소송을 걸었다.
10년이 넘은 송사 끝에 사건은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가고, 1857년 유명한 ‘드레드 스콧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관 9인 중 7인의 다수의견을 집필한 로저 토니 대법원장은 선언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의 후예는 자유민이든 노예든 미국 시민이 될 수 없고, 미국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권리도 없다. 흑인 노예는 노예주의 사적 소유물이다. 헌법상 누구도 적법절차 없이는 노예라는 소유물에 대한 재산권을 박탈할 수 없다.” 이 판결은 노예제도를 제한하는 의회의 법률은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노예제 찬성론자들은 이 판결로 노예제에 대한 의회 규제를 막고 논란을 종식하려 했지만, 결과는 대중의 격렬한 비난과 분노였다. 1861년 미국은 남북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은 “행장이 선량한 한” 법관이 그 직위를 보유한다고 하여, 사법권 독립의 기반이 된 신분 보장을 최초로 헌법 조문에 적어 놓은 나라다. 스콧 판결을 내릴 당시의 연방대법원은 독립돼 있었을까? 노예제 찬성론자인 제임스 뷰캐넌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서 대법관 중 한 명에게 언제 판결을 내릴 것인지를 묻는 편지를 보내고, 다른 한 명에게는 다수의견에 동조해 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나머지 7인의 대법관들은 그런 부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이 판결이 누군가의 간섭을 받아 결론을 내린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문제가 있었다면 당시 대법원 구성원 중 다수가 노예제도 찬성론자였다는 사실뿐이다.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 중 가장 수치스럽다는 평을 받는 판결, 한 나라 안에 같이 사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을 법의 보호 밖으로 내팽개친 이 악명 높은 판결은, 분명 독립되었다는 법원이 내린 것이다.
사법권이 독립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타당성을 의심할 수 없다. 법원이 어떤 세력의 영향력을 받아 판결한다면 일단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왜 사법권이 독립돼야 하는가? 달리 말해 독립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독립해서 올바른 판결을 하자는 것이 답이다. 질문을 바꾸어 보자. 독립한 사법부가 하는 판결은 항상 올바른가? 찰스 에번스 휴스 대법원장은 스콧 판결을 “대법원이 가한 가장 큰 자해”라고 표현했다. 독립해서 내린 이 판결은 자국의 법관들에게마저 비난을 받는다. 정치적 문제에 이 어처구니없는 사법적 해결책을 제공한 로저 토니.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정책을 사사건건 훼방하고 물어뜯던 이 인물은, 사후인 2022년 연방의사당 내 자신의 흉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사법권 독립은 절대적 가치로 인식되는 듯하다. 사법권 독립의 침해는 거의 신성모독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법권이 또는 법관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올바른 판결을 하기 위해서다. 올바른 판결이란 무엇인가. 결론이 사실과 법에 들어맞아야 하고 헌법적 가치 수호의 이념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판결이 나오는 과정을 당사자가 납득해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렇다. 독립한 사법부가 독립하지 않은 사법부보다 좋은 판결을 낼 가능성이 항상 높아야 독립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느 논자는 판결에 대한 비판은 법관의 전속적 권한인 사실인정이나 유무죄에 대한 비판이어서는 안 되며, 그런 비판은 사법권 독립에 대한 훼손이라고 주장했다. 오해가 지나치지 않은가. 무릇 판결에 대한 비판의 이유는 대부분 사실인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판결에 대한 비판이란 결국 결론을 겨냥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못한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법권 독립이란 독립하여 올바른 판결을 하라는 것이지, 독립해서 한 판결이니 그것에 항의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법권 독립의 실증적 기초는 이렇다. 간섭받지 않아야 올바른 판결이 나온다는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해도 올바른 판결이 나올 수 없을 지경이라면, 그런 사법권 독립은 무의미하다.
판결은 국가의 권력작용이다. 권력의 행사에 국민은 비판의 눈을 뜨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낸다. 유독 사법부의 권력작용만 예외일 수는 없다. 혹시라도 판결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는 논리가 기껏 사법권 독립이라면, 딱한 일이다. 오해하지 말라. 사법권 독립은 가치중립적 개념이며, 궁극적 이상이 아니라 도구적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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