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샤프펜슬이 아니라 연필 세대다. 연필심을 보관통에 집어넣고 맨 위 버튼을 누를 때마다 자동으로 심이 조금씩 나오는 샤프펜슬과는 달리 연필은 칼로 직접 끝자락을 깎아야 심이 나왔다. 이를테면 샤프펜슬이 디지털이라면 연필은 아날로그였던 셈이다. 내 기억으론 그때 난 친구들과 연필을 가장 빠르고 예쁘게 깎는 시합도 벌였다. 난 아직도 책을 읽으면서 책장에 뭔가를 기록해두거나 노트에 요약할 때 연필로 써야 마음이 편안하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젠 칼 대신 연필깎이를 쓴다는 것.
모든 게 귀했던 국민학교(!) 시절 우린 새 연필이 생기면 닳고 닳아 몽땅하게 될 때까지 써야 했다. 심지어 연필이 엄지와 검지로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짧디짧은 몽당연필이 되어도 머리 부분을 칼로 다듬어 어렵사리 구한 볼펜 몸체에 끼워서 썼다. 가수 마이진의 노래 <몽당연필>에서 “닳고 닳은 인생이라 비웃지 마소”와 “내 목숨이 줄어드는 줄도 모르고”라는 가사가 애틋하게 귀에 착 꽂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몽당연필’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과 애환이 오롯이 담겨있는 단어가 바로 ‘책보’다.
그 시절 우리 소꿉친구들 사전辭典엔 ‘책가방’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우린 등교 전날 저녁이나 당일 아침에 방바닥이나 마룻바닥에 보자기를 펴놓고 그 위에 수업에 쓸 책들과 공책들을 대각선으로 놓은 다음 둘둘 싸서 방 한쪽에 챙겨놓았다. 우린 그 책 다발을 ‘책을 싼 보자기’의 줄임말인 ‘책보’라 불렀는데, 이럴 때 ‘책보’는 당연히 ‘책가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책보’는 그냥 ‘보자기’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보자기조차 귀했던 시절이었으니 어렵사리 보자기가 생기면 으레 책보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당시 책보를 꾸릴 때 가운데쯤에는 필통을 넣었고, 둘둘 만 보자기 끝자락은 풀어지지 않도록 오삔(!)으로 고정했다. 이어 부리나케 아침밥을 먹은 후, 어떤 친구는 책보를 마치 벨트처럼 허리에 두른 채, 어떤 친구는 마치 검객이 칼을 메듯 대각선으로 어깨에 멘 채 대문을 나서자마자 학교를 향해 쏜살같이 뛰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해서 책보를 열면 필통 속 연필심은 이미 부러져있기 일쑤였고, 가끔 책보에 도시락을 함께 쌌을라치면 책들과 공책들이 모두 김칫국물로 범벅이 되기도 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린 다음 날 아침도 어김없이 무조건 달려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업 전에 연필을 깎느라 바빴다. 그때 우리가 왜 그렇게 무작정 뛰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늘 그렇듯 힘이 넘쳤거나, 얼른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공부하고 놀 생각에 마냥 신이 났기 때문이리라. 혹은 그냥 좋아서 그랬으리라. 어린 시절은 그저 바람만 불어도, 비만 와도, 눈만 내려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순진무구한 때가 아니었던가?
선물 보자기를 보면 불현듯 어린 시절 책보를 메고 신작로를 질주하던 내 모습과 더불어 또 다른 광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때가 되면 엄마가 내게 책보를 가져오게 하여 가운처럼 내 목에 두르고 바리깡(!)과 가위로 머리를 깎아주시던 장면이다. 궁핍한 시대였는지라 설 명절 등 특별한 날 외엔 자식들을 이발소에 보내지 못했기에 집집마다 생긴 진풍경이다. 내가 4남 2녀 중 막내라서 엄마의 시행착오를 경험하지 못한 덕분일까? 내 생각엔 당시 엄마의 바리깡과 가위질 솜씨는 단연 우리 동네 최고였다.
김원익 세계신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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